“큰 그림 그리고 한국사회 모범으로 가야” 백지화 뒤 부안...지도자 문제 중요 주민참여와 결정...이것이 곧 자치넓은 마음과 배짱으로 위대함 갖자

법원이 지난 10일 검찰이 제출한 김종성 대책위(핵폐기장백지화 핵발전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의 영장을 기각했다. 이날 오전 기자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상황은 녹록찮았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서는 현장구속을 감수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부모님을 모시는 장남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김위원장의 인간적 고뇌야 안타까운 일로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부안항쟁을 이끌었던 집행위원장으로서 위치로 보면 재구속은 해결 단계에 접어든 부안 싸움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될 뻔했다.
11일 가진 인터뷰에서 김위원장은 이런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했다. “구속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많이 했어요. 갑갑했죠. 신부님이나 교무님 등 주위 분들도 걱정을 했고요. 부모님한테는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구속됐다면 충격이 컸을 겁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 무엇보다 집행 책임자가 구속되면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끝나가고 있는 부안 문제가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판사에게도 이 부분을 얘기했고요.”

구인장 발부, 노정권 국정운영 문제점 드러낸 것
편파 수사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 핵폐기장 건은 대검에서 직접 통제하는 사안이라 일선 경찰들마저 구속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어떤 혐의라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김위원장에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판사까지 영장실질심사 이전에 김위원장의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얘기할 정도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더 나아가 구인장 발부를 한 사건은 정부 입장이 내부에서 관철되지 않고 있는 사례로 해석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부안에서 발을 뺐다”고 낙관적으로 풀이했다.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 얘기를 하고 한수원의 부안철수와 견학지원 중단, 그리고 군청과 도청의 갈등을 보면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론화 기구 구성이 늦춰지면서 정부의 명시적인 ‘백지화’ 발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주민들이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백지화가 아니라도 수용할 만한 정책 변화가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한수원 철수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조치가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구속자 사면복권, 책임자 처벌, 부안 갈등 치유책 제시 등까지 발전해야 명시적인 백지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공론화 기구에서 이런 논의를 하기로 한 이상 기구가 언제 뜨느냐가 중요합니다.”

공론화 기구, 백지화의 근간
공론화 기구의 추진속도를 곧 부안 문제 해결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공론화 기구에 대해서는 “여당의 국민통합추진위원회에서 중재안을 마련했고 시민단체와 부안은 받아들였지만 정부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부처간 협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늦춰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그는 핵폐기장을 중저준위와 고준위로 나눌 것인가, 핵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총론에서 협의되면 기구 구성문제 등 각론은 오히려 쉽게 풀릴 것이라는 주장도 내 놓았다.
“정부에서 시민단체를 못 믿는 측면도 있고 그 반대로 시민단체 역시 정부를 못 믿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들어가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항간에 부정적 측면을 얘기하면서 불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주어진 공간을 충분히 활용해야 문제가 풀립니다. 다만 풀리지 않는 것은 군민의 힘, 국민의 노력으로 강제성을 띄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공론화 기구와 함께 부안항쟁을 통해 자라난 자치 역량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도 논의돼야 할 때라고 말한다. 정부에는 부안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방침을 세워야 한다는 요구를 계속하고 안에서는 주민자치와 부안 발전 문제 등을 풀어가는 방향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안에서 진정한 주민자치 실현 가능
“핵폐기장 문제 해결 뒤 부안의 모습 즉, 큰 그림을 그리는 논의가 필요해요. 주민자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모범적으로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미 돼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이번 투쟁을 통해 지도자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선거와 직결되는 문제라 선뜻 끌어내 토론하기 어려워 갑갑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민한 문제에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원칙은 바로 싸움 과정에서 얻어낸 성과를 주민들에게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주민의 결집된 힘과 성과를 기득권에게 내주는 사례는 많이 있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쥐락펴락한 예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작업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부안에서 주민자치의 실례를 보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격포에서 마라톤 행사를 거부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김종규 군수가 짜낸 사업이기 때문에 거부했는데 나중에는 주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진전된 생각으로 거부를 결정했어요. 하프마라톤 대회가 주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거기에 쓰는 예산은 낭비라는 판단이지요. 미스 변산 선발대회도 이런 생각에서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판단하는 것, 이것이 주민자치 아닙니까.”
아울러 이장들이 하프마라톤 대회를 놓고 몇 차례 회의를 하고 판단을 못하자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 이를 근거로 결정을 내린 점도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80% 이상의 주민들이 마라톤대회 개최를 반대했었다.
그는 최근 부안군의 개발계획과 관련, “열린음악회나 영상테마파크 등으로 부안 관광의 활로를 찾겠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며 “진정한 발전은 주민들의 참여와 결집된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종규 퇴진투쟁이나 조직운도의 방향 등 백지화 이후의 자치운동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계획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밝혀 총론의 명징함에 비해 각론의 모호함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부안싸움 한 달 안에 끝날 줄 알았다”
사실 대책위를 처음 구성할 때만 하더라도 반핵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이는 김종규 군수를 너무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김종규 군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핵폐기장 유치에 반대하고 유치신청을 발표하기 8시간 전까지 반대한다고 얘기한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단체장의 신청 여부가 중요했기 때문에 군산 신시도 문제가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위도문제도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7월 중에 싸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셈입니다. 단체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어요. 거짓말을 하면서 뒤에 그렇게 큰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누가 알았겠어요.”
이렇게 시작된 군민들의 싸움은 매일매일 계속됐다. 하루라도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일어난 상황에 대처하고 주민들의 분노를 풀면서도 동시에 힘을 모아야 하는 과제가 대책위에 떨어졌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군민들은 쇠파이프와 가스통을 움켜쥐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누구의 명령도 없이 자발적으로 어우러졌다.
지난해 7월 처음 집회를 시작할 때는 쇠파이프를 들지 않았다. 14일 첫 대규모 집회에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22일에는 이인열 씨가 차를 몰고 전경의 대오를 향해 돌진할 정도로 폭력에 무방비 상태에 놓이면서 자연스럽게 방어수단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25일 행정자치부 장관 등의 부안군청 방문 항의 집회에서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그날부터 촛불집회 얘기가 나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 전경들 끌고 나오면 물도 주고 저쪽에서 쉬고 가라고 챙겨주고 그랬는데 너무 많이 당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몽둥이가 나오는 거죠. 이장님 한 분은 군청 앞에서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어요. 정부와 대화가 결렬되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거죠. 열심히 싸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만도 없고, 받아들이자니 동력에 영향을 미치는 이상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할머니들의 촛불이 큰 힘이 됐습니다.”

“수배생활로 투쟁 함께 못해 힘들어”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결국 김위원장도 수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5개월을 성당에서 지내면서 집회에만 왔다갔다하는 상황에 처했다. 밖에서는 큰 싸움이 매일 벌어지는데 성당에서 틀어박혀 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법하다.
김위원장도 가장 힘들었던 것을 묻는 질문에 이를 거론한다. “주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도 태풍 매미가 올 때나, 눈보라가 칠 때나 싸움을 멈추지 않았어요. 수배가 떨어져 5개월 동안 성당에서 생활하면서 그 분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힘들었어요. 12월에는 전경들에게 수협 앞을 뺏겨 주민들이 성당에 들어와 촛불집회를 했는데 저는 오히려 주민들과 매일매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김종규 군수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은 “얘기할 대상이 아니다”였다. 부안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사람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는 설명이다.
다만 김위원장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국책사업추진연맹은 이해할 수 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일을 해야 할 사람이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가면 용서를 못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부안군민이 넓은 마음과 배짱을 가지고 부안의 주인으로 부안의 위대함을 핵폐기장 문제 해결 이후에도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주문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아이들과 부모님에게는 미안함을 아내 최문희 씨에게는 감사함을 전했다.
/대담=문병원 편집국장
정리=한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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