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는 여름이 되면 홍수가 지기를 기다렸다.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동안의 어느 날에는 세상을 온통 쓸어가 버릴 것처럼 새찬 빗소리가 밤새 들리는 날이 있다. 두려움 속에서도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자고 난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홍수로 거대한 강이 되는 냇물을 볼 수 있었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우리는 방천둑에 나가 도도하게 흘러가는 붉은 물을 보고 서있었다. 큰 나무가 뿌리 채 뽑혀 떠내려가기도 하고 돼지 같은 가축들이 물위로 올라왔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며 휩쓸려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만 관념일 뿐 현상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거만한 듯 당당한 듯 위용을 자랑하며 거침없이 흘러가는 붉은 물이었다. 한 해 여름에는 강변 저쪽에 살던 타성받이 육손이네 집이 떠내려가고 육손네 어머니가 끊겨져 조금씩 허물어지는 제방에서 오락가락하며 구조를 기다리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일도 있었다. 방천둑에서 물 구경을 하던 우리는 다만 걱정을 해주기만 했다. 사실은 맘먹고 걱정할 새도 없이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든 헬기를 타고 구조되었기 때문에 떠내려갈 뻔한 육손네가 마냥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 물난리로 육손네는 정부의 보조를 받아 마을 안쪽에 집을 짓고 당당하게 마을로 진입을 해서 마을 사람이 되었다.

여름철 물난리는 이렇게 뜻하지 않게 집을 잃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물난리는 재앙이 아니라 견딜만한 고생이었고 또 다른 혜택이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겪는 물난리는 철없는 우리들에게는 물 빠진 방천둑에 널려 있는 인삼 이삭을 주우면서 삼장 잃은 사람의 안타까운 심정과 상관없이 횡재하는 기쁨을 누리는 행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분되게 즐거운 것은 그렇게 홍수로 냇물이 뒤집어 지면 저절로 깨끗해진 냇물이 여름내 우리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는 것이다. 물이 어떻게 뒤집어지는가에 따라 자갈로 뒤덮인 발바닥 아픈 물놀이장이 되기도 하고, 고운 모래가 비단처럼 깔린 바라마지 않는 물놀이장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물놀이장이든 장마 뒤의 물놀이장은 불어난 물만큼이나 우리를 부풀게 했다.

최근에 해마다 물난리가 되풀이되고 수재민 돕기 방송도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제껏 홍수마저도 혜택이었던 고향 마을도 이런 수마에서 비껴날 수 없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진다.

기상 관측소가 세워진 이래 처음이라며 연신 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우가 해마다 되풀이되는 까닭이다.

다만 그래도 믿는 바가 있다면 이런 여름날의 자연 재해가 아직은 인재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고향은 다행히 첩첩 산중이지만 그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이용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잡은 탓에 산을 깎아내고 물길을 트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고 한다. 즉 지금의 안정적인 지구가 되기까지는 45억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구는 불이었다가 얼음이었다가 갈라졌다가 붙었다가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명도 함께 요동쳤을 것이다. 그런 지구가 지금은 그래도 안정기로 접어들어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 말고도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유희를 즐기며 문명을 일구며 살고 있다. 어쩌면 지구가 생겨난 이래 최적의 자연의 혜택을 누린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국토 또한 어느 나라 못지않게 안정적인 자연에서 최상의 혜택을 누리는지 모른다. 그런데 수십억 년의 세월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루아침에 결딴내고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우리 국토의 척추를 개발지상주의자들은 필요 이상의 도로를 만들면서 산허리를 뚝 끊어 놓았다. 아름다운 계곡마다 관광지를 개발하면서 숱한 세월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만들어 놓은 자연스런 물길을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마음대로 막아버리고 틀어 버렸다.

오천 년의 세월이 만들었다는 새만금 갯벌을 하루아침에 죽이는 엄섬한 현실 속에서 ‘하릅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희희낙락하고 있다.

그러고도 있는 댐도 제대로 이용 못 해 물난리의 고통을 겪게 한 위정자들은 수해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동강댐과 한탄강 댐을 만들지 못하게 한 환경 운동가들에게 책임을 돌리며 개발지상주의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뻔뻔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

올 여름의 물난리는 이런 두려움을 모르는 자연 파괴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결과가 가져온 인재라고 봐야 한다. 결코 홍수를 지게 한 하늘의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45억 년이라는 긴 세월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겨우 안정을 되찾은 지구를 다시 꿈틀대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재앙이 사람에게 고스란히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홍수가 천재지변이 되기 전에 우린 겸허하게 자연 앞에서 반성해야 한다. 오천 년 세월이 만들어 놓은 새만금 갯벌도 살리면서.

아직은 우리에게 홍수는 천재가 아니고 하늘이 선사하는 여름방학 선물이고 생명마다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의 힘찬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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