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 주어진 유일한 혁명 도구인 선거

가끔 옷 때문에 아이들하고 다투는 때가 있다. 옷장 가득히 들어있는 옷을 두고도 입을 게 없다느니 하며 이것 저 것 꺼내 뒤적여 놓을 때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치고 만다. 평소 아이들 옷을 잘 사주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갈아입지 못할 만큼 궁색한 입성은 아니다. 문제는 외출복과 평상복을 구별 않고 함께 입어 더럽혀 놓은 데 있다.

하지만 어쩌랴! 한창 뛰어 놀기 좋아하고 조심성 없을 사내 아이들에게 그런 까다롭고 틀에 박힌 주문이 통할 리는 없다. 그저 새 옷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참이다. 몸에 맞아 가릴 곳 가려주기만 하면 그만인 한 벌 옷도 맘에 드는 놈을 고르기 위해서는 이렇듯 정신을 모아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을 가려 뽑는 일이라면 오죽할 것인가? 더구나 그에게 내가 살고 있는 고을의 살림을 맡겨야 하는 문제이고 보면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선거 날이 다가올수록 누구에게 표를 주어야 하나 궁리를 해 보지만, 꼭 옷장 앞에서 이 옷 저 옷 뒤적이며 망설이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이 되고 만다. 열 길 물속도 모르겠는데 오다가다 옷깃으로 스쳐 마주친 사람 속이야 더욱 모를 일 아닌가? 게다가 손가락이라도 잘라 내버리고 싶을 만큼 된통 한 번 당하고 나니 내가 던지는 한 표가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여 소름마저 돋으려 한다.

예부터 훌륭한 임금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다스린다 하였다. 정치 또한 그와 같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오히려 잘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뀌어도 결국 변한 게 없더라’ 하는 식의 ‘포기’나 ‘소외’로부터 오는 무관심이 아니라, 늘 상 있는 공기처럼 그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진정한 ‘관심 없음’ 말이다.

최근 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정치 흐름은 그 뿌리가 새만금 문제에 가 닿아 있다. 새만금만큼 오랫동안, 철저하게 부안을 정치 희생물로 삼은 예는 없다. 새만금은 선거 때마다 되는 대로 외쳐 울궈먹는, 정치꾼들에게는 그야말로 노다지 금광 같은 것. 그러나 그 긴 사기극도 이젠 끝이 났다. 둑이 막히면서부터 드러나고 있는 대 재앙의 조짐은 머지않아 지금껏 풀어 놓았던 모든 말들이 헛된 꿈이었음을 증명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들이닥친 핵폐기장 문제는 부안을 두 번 죽이는, 부안에 대한 ‘확인사살’이었다. 핵폐기장 사건이 가져온 갈등과 상처는 부안에 단단한 응어리로 남았다. 무던히도 애써보지만 모두들 그 상처와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속병을 앓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픔이 아물어 없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단단하게 굳어져 간다. 왜 그런가?

얻어맞은 나는 분명 여기 있는데 두들겨 팬 놈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의 우두머리들이 그랬듯, 부안 민중을 짓밟았던 자들도 정치라는 어설픈 그물망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죄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잘 해 보려고 그랬는데, 죄송하다”는 한 마디 말이 부안 민중에게 던져진 웃지못할 ‘치유 프로그램(?)’이다.

중국 사람들은 정치가 바로 잡혀 나라가 든든할 때 공맹(孔孟)을 읽고, 반대로 정치가 어지러워 나라가 흔들릴 때에는 노장(老壯)을 읽었다 한다. 공자·맹자는 나무뿌리를 그대로 두고 잘못된 가지를 바로잡는 것을 뜻하며, 노자·장자는 아예 새 묘목을 심어 가꾸는 것을 말한다.

선거가 낼 모래다. 선거는 힘없는 민중에게 주어진 유일한 혁명의 도구이다. 곁가지를 손댈 것인가? 새 묘목을 심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핵폐기장 문제로 불이 당겨진 ‘부안민중항쟁’의 긴 끝맺음이 결국 5·31 지방선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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