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후천개벽을 꿈꾼 동학…“갑자년에 새 세상 온다더니…”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수운 선생을 형상화한 그림. 경주 용담정의 한 병풍에 실려있다. ⓒ 염기동 기자
수운, 개벽을 원하는 민심을 읽다

1864년은 갑자(甲子)년이었다. 이 해 3월10일에 수운 최제우 선생은 대구 장대(將臺; 경상감영의 훈련장)에서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시켰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만 40세였다. 이로써 수운은 득도한지 4년 만에, 그리고 1861년 6월부터 정식으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지 만 3년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공적(公的) 생애를 죽음으로써 마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수운 선생은 하필이면 갑자년인 1864년에 순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대답을 선생이 그토록 절절하게 외쳤던 ‘다시 개벽(開闢)’의 사상, 즉 후천개벽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수운은 한국근대 종교사상가 가운데 처음으로 개벽사상을 강조했다. 원래 개벽이란 말은 주역(周易)에서 유래하지만, 그것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수운 선생님 덕분이다. 그런데 수운은 개벽을 말하되 ‘다시 개벽’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말했다. 왜 ‘다시 개벽’ 즉 후천개벽을 말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까?

수운은 일찍이 20세를 전후해 10여 년 이상 전국을 방랑하며 세태의 변화와 인심풍속의 해이현상을 목격한 바 있었다. 선생의 눈에 비친 당시의 세상은 한 마디로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부족하며 공맹(孔孟)의 말씀으로도 부족한 시대였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과 같은 기존 윤리가 있긴 있었지마는,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는, 그야말로 인심풍속이 괴이하기 그지없는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상해(傷害)의 운수로 가득 차서 생명을 가진 수많은 존재들이 크게 다치고 격심한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잦은 민란(民亂),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재해, 악덕 하급관리들의 가렴주구 등으로 풀뿌리 민중들이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없던 시대였던 것이다.

게다가 십이제국(온 세상)에는 괴질(怪疾; 콜레라 또는 장티푸스)이 크게 유행해 한 해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양 제국주의열강의 동점(東漸)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속속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감으로써, 우리나라도 언제 순망치한(脣亡齒寒;중국이 서양에 당하면 조선도 당하리라는 것을 비유한 말)의 민족적 위기를 당할 지 한 길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이 혼란하기 그지없는 시대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막지소향(莫知所向), 즉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기대야 할 지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난리를 피하기 위해 십승지(十勝地) 찾기에 바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무서운 괴질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부(靈符)와 선약(仙藥) 구하는데 눈이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정감록(鄭鑑錄)』을 비롯한 온갖 비결(秘訣) 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지각이 있다는 지식층들은 진인(眞人)이나 이인(異人) 출현을 빙자해 민중들을 끌어 모은 다음, 썩어 문드러져가는 세상을 바꿔보려고 병란(兵亂; 무장 봉기)을 일으켜 보기도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

이리 하지도 저리 하지도 못하는 세상 속에서 민심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면서 요동치고 있었고, 무엇인가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의 고요랄까, 한 점 불씨를 기다리는 마르고 마른 대평원이랄까, 민심은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어떤 결정적인 변화, 이른바 개벽(開闢)의 계기가 어서 빨리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동경대전', '정감록', '용담유사'ⓒ 염기동 기자

‘다시 개벽’ 사상의 연원과 실천

젊은 시절 전국을 방랑하면서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시대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개벽의 계기가 어서 빨리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민심을 실감할 수 있었던 수운 선생은 득도 직후,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몽중노소문답가」)”라 하면서,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오고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제 역사는 저 하원갑(下元甲)의 시대 즉 낡고 병들고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선천시대는 가고, 상원갑(上元甲) 즉 새롭고 생명이 넘치고 모든 모순이 다 해결되는 후천시대가 오고 있으며, 돌아오는 상원갑 호시절에는 가난하고 천한 모든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고 귀한 사람이 되며, 모든 사람은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양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갑자(甲子)의 간지(干支)가 들어가는 해에 새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같은 사고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해 제시한 이가 바로 중국 송(宋)나라 학자 소강절(邵康節)이다.

그는『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라는 책에서 우주의 역사는 춘하추동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따라 원회운세(元會運世)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주 1년 즉 1원(元)은 12만9600년이요, 그 1원에는 다시 12회(會)가 있으니 1회인 1만8백년마다 소개벽(小開闢)이 일어난다고 했다. 또한, 1회에는 30운(運)이 있으며 그 1운은 360년이고, 또 1운에는 12세(世)가 있으니 1세는 30년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1원은 12회, 360운, 4320세, 12만9600년이 된다.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첫 회(會)인 자회(子會)에서부터 시작되어 6회 째인 사회(巳會)까지 성장하며, 후반부 첫 회인 오회(午會)부터 해회(亥會)까지는 줄어드는데, 우주의 가을에 해당하는 미회(未會)에서는 우주의 시간대가 새로운 질서로 접어드는 후천개벽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소강절은 또한 우주의 1원(元) 12만9600년 가운데 인류 문명의 생존기간은 건운(乾運)의 선천 5만 년과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며, 나머지 2만9600년은 빙하기로 천지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기라고 보았다. 요컨대,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가을이 되면 우주의 봄과 여름인 선천 5만 년이 끝나고, 후천 5만 년의 역사 즉 후천개벽의 새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이 득도 이전에 소강절의 사상을 깊이 공부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구석구석에 소강절의 원회운세론(元會運世論)과 상통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는 점에서 볼 때, 선생은 소강절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수운의 ‘다시 개벽’ 사상은 소강절의 원회운세론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소강절의 원회운세론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체제가 세계의 전부로 이해되던 중세(中世)의 산물이라면, 수운의 ‘다시 개벽’ 사상은 그러한 동아시아체제가 해체되고 세계체제가 대두되던 근대(近代)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소강절과 수운의 세계 인식에는 메꿀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또 하나의 근본적 차이는 수운의 ‘다시 개벽’ 사상이 단순한 이론적 제시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그저 말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선생은 가르침을 받고자 경주 용담으로 밀려드는 제자들에게 반상과 귀천, 적서와 남여 차별 등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 평등한 존재, 거룩한 하늘님과 같은 존재로 대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선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공동체는 가장 이상적인 평등공동체 그 자체였다. 그 같은 정경은 선생을 ‘서학쟁이’라고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보수유생들의 눈에조차 가히 혁명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귀천과 등위를 차별하지 않아 백정과 술장사 같은 천한 이들이 다투어 모여들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 薄, 집회소; 註)을 설치하여 가르침을 펴니 홀아비와 과부들과 같이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돈과 재물을 좋아하여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기뻐하였다(「동학배척통문」, 1863)”고 했으니 말이다.

경주 용담정에 있는 수운 최제우 선생 동상 ⓒ 염기동 기자

수운의 죽음을 몰고 온 ‘다시 개벽’ 사상

수운 선생은 경신년(1860)에 하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무엇에 비길 바 없는 가장 크고 위대한 가르침(無極大道)’을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선생의 가르침은 민중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선생의 가르침이 당시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까닭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다시 개벽’의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남 먼저 알았을 뿐 아니라, 천지개벽과도 같은 근본적 변화를 갈망하는 민심을 제대로 읽어내고, 일찍이 전례 없던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당시 민중들의 눈과 귀,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없는 자와 있는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재주가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이 서로 베풀고 서로 나누도록 가르쳤던 선생의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가르침 속에서 민중들이 비로소 사람다운 대접, 신바람 나는 세상을 처음으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861년 6월 이후, 민중들에게 신인(神人) 또는 진인(眞人)과도 같은 존재였던 수운이 가르침을 펴고 있던 경주 용담에서는 특별한 공동체 하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문제였다.

경주를 비롯하여 경상도의 보수유생들과 조선왕조 지배층은, ‘다시 개벽’이라는 불온하기 그지없는 말을 퍼뜨리면서, 하늘이 정해준 질서로 간주되는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모시라고 가르치는 수운 밑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민중들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배층에게는 특히 “갑자년에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던 수운의 ‘다시 개벽’ 사상은 불온사상 그 자체였다.

지배층은 돌아오는 갑자년(1864)이 다 가기 전에 어떤 대책을 수립해야 했다. 바로 이것이 갑자년에 수운 선생이 처형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결정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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