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에 조성된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해가 바뀐 1895년 1월 10일, 부안지역에서 활동하던 이기범(李基凡) 등 3명을 붙잡은 정부군은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압송(押送)해 갔다. 그리고 곽덕언(郭德彦)이 고부(古阜)로 압송을 당했으며, 송성구(宋成九) 등 9명은 부안현에서 잡아 가두고 엄중히 조사하여 죄상과 실상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일본군과 정부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동학농민군을 서남해안으로 내몰던 1895년 1월 24일, 전에 장령(掌令․사헌부의 정4품) 벼슬을 지낸 김수형(金秀馨)이라는 사람이 무장현에서 부안 향교에 통문(通文)을 보냈다. “전부터 동학에 가담했던, 새로 가담했던 작란(作亂)에 참여한 자는 뿌리 채 뽑아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되니, 한마음으로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학농민군 섬멸(殲滅)에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재촉이었다.
이처럼 정부군과 일본군, 그리고 지방관아와 토착세력이 주도하여 동학농민군 섬멸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붙잡힌 동학농민군은 다수가 학살(虐殺)에 가까운 처벌을 당한 것으로 전한다. 평상시와 달리 전시(戰時)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참수(斬首)하고 나중에 보고하는 방식이 허용된 때문이었다.
이처럼 살벌하던 시기에 미담(美談)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부안의 별유사(別有司) 김군오(金君五)와 채기삼(蔡奇三), 그리고 수성군(守城軍) 1명이 홍해 마을에 와서 강일봉(姜日鳳)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점을 참작하여 놓아 준 뒤에 마을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이 어린 참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 중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경우도 있지만 다수는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주로 정탐(偵探)이나 지휘관의 심부름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반란군에 가담한 역적이 됨으로, 이들에 대한 처벌이 관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부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처벌하지 않고 석방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민심수습 차원에서 조세의 1/3을 감해주기도 하였다.
동학농민군 체포와 처벌이 소강상태를 이루던 2월 12일, 남문 밖에서 동학농민군 9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2월 22일에 동학농민군 7명이 처형을 당하였는데,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즈음 동학농민군을 체포하는 일이 심하게 벌어졌다. 2월 한 달 동안 16명이 처형을 당하였는데, 이들의 이름을 비롯한 신상(身上)은 물론 처형 장소마저 확인할 수 없다. 2월 12일의 처형이 남문이었듯이 같은 남문인지, 아니면 입소문으로 전하는 동문인지 뚜렷하지 않다. 이처럼 2월 한 달 16명이 부안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안 대접주 김낙철의 사촌동생 김낙정이 “사촌형님[김낙철]이 올라온 뒤에 군수가 불량한 사람들 중 향촌의 유생 유정문(柳正文)과 최봉수[崔鳳洙․그 당시 향교의 장의(掌議)였고 여러 대(代)에 걸쳐 김낙철의 이웃에 살던 사람이었다.] 등의 사주(使嗾)를 받아 죄 없는 교인 20여명을 쏘아 죽였습니다.”라며 부안의 정황을 김낙철에게 설명한 것이다. 20여 명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앞서 언급한 16명과 비슷한 숫자의 동학농민군이 부안에서 처형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부안관아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부안의 유생이 부안 군수를 사주하여 이루어졌다. 사사로운 보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지역사회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부안에서 9명과 7명 등 16명이 처형을 당하고 한 달이 지난 3월 18일, 장소는 확인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 김석윤(金錫允)이 처형을 당하였다. 부안 대접주 김낙철이 김석윤을 통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 부안 동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행적은 전하지 않지만, 2차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었다. 
같은 해 3월 23일에는 부안 관아와 주산면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한(漢)이라는 사람이 와서 “본 읍 동학 거괴(巨魁) 백사중(白士仲)․손수일(孫秀一)․이상용(李尙用)․심명언(辛明彦)․신공선(辛公先) 다섯 놈을 부득이 체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백성들은 놀라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전령을 기행현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부안 관아에서 “김여중[낙철] 형제가 도주하였으므로 그 종제(從弟)를 붙잡아 들여 별장[別杖․중죄(重罪)의 증거가 명백함에도 문초(問招)에 자백하지 않을 때에는 문안(文案)을 만들어서 법대로 고문하게 되는데 이때에 쓰는 형장(刑杖)으로 별도로 만든 것을 말함] 10여도를 때리고, 김낙철이 스스로 관아에 자수하라고 하면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규로와 이성오는 붙잡아 들어 엄히 다루고 다시 가둔 뒤 영문(營門)에 정배(定配)를 아뢰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1895년 5월까지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추적과 체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 중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노대규․노입문․박문표․김봉보․송성구․김석윤 등 6명이며, 장소는 남문 밖이었다. 이외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신원(身元)과 장소마저 확인되지 않는 16명이 희생을 당하였다. 그리고 백원장․백사준․김여중․김명중․모치옥․오치호․임행춘․손순서․손양숙․김인권․배홍렬․이기범․곽덕언․이화일․신소능․김도삼․이규로․이성오 등이 체포당한 후 석방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강일봉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박대길 (부안군/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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