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전투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자행하는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를 비롯한 공주전투에서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며 패배하였다. 이 소식은 부안에도 전해졌다. 이때의 상황을 『홍재일기』는 “[11월] 9일에 접전하였는데 전봉준이 또 대패하였고,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우금치전투는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벌어진 가장 치열한 전투로 동학농민군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다. 이때의 광경은 일방적인 학살과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재기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우금치전투의 패전 원인은 ① 손화중․김개남․최경선 등의 불참으로 전력이 분산되었고, ② 유격전이 아닌 전면전을 벌이는 등 전투 수행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③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에 비해 구식무기와 죽창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지니고 있는 화력(火力)의 열세가 결정적이었다.
이와 함께 『홍재일기』는 “동학인 전봉준과 김기범[개남]이 패주하여 원평에 이르렀다. 경군(京軍)이 3도로 병진하여 68,000명[태인전투에 참여한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 따라서 6만8천여 명이 전라 감영이 내려왔다는 것은 숫자상의 오류이다.]이 전라 감영에 들어갔다. 한 부대가 김제 만경으로, 한 부대가 금구 원평에 이르렀는데 동학군이 대패하였다.[금우 원편 구미란 전투를 가리킨다.] 대장 신정희(申正熙)와 남원부사 이용헌이 동학에게 살해당했는데[남원부사 이용헌이 김개남에게 살해당한 것은 맞지만, 신정희는 양호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로 임명되어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으나 위 내용과 무관하다.] 그로 인해 그 아우 □□가 복수장군으로 병사를 이끌고 내려 왔다. 대구 중군 박항래 역시 복수 하러 병사를 이끌고 내려 왔다고 한다. 고부 신관 양□□[梁弼煥]이 동학에 살해당하였는데,[고부 군수 양필환은 저항하다 매를 맞고 풀려났으나 장독(杖毒)으로 사망하였다.] 읍에서 시신을 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읍을 도륙하고 읍명을 바꾸었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오류가 눈에 띄지만, 동학농민군의 일방적인 패배와 그에 다른 정황이 고스란히 부안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동학혁명군위령탑

 

그리고 11월 28일 일기에 “태인에서 경군과 동학이 접전을 벌였는데 동학이 패주하였다.”고 하여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주력군이 태인전투에서 패배한 정황을 전하고 있다. 태인전투 이후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해산한 뒤 장성의 백양사를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가 피노리에서 체포당하였고, 손병희는 태인에서 전봉준과 헤어진 후 북상하다가 무주에서 전투를 벌이는 등 항전하며 충청도로 들어간 뒤 잠적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공주전투에서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며 패배하였고,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은 동학농민군의 섬멸(殲滅)을 목적으로 학살을 하며 남하(南下)하였다. 그 즈음 부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홍재일기』를 통해 그 정황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정부군과 일본군이 태인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며 호남의 남쪽바다까지 추격할 때, 부안에서는 동학농민군 체포와 함께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는 선무책(宣撫策)이 실시하였다. 부안에서 맨 처음 정부군에 붙잡힌 동학농민군은 외요촌에 사는 백원장(白元章)이었다. 그는 삼원장(三元丈) 백성흠(白性欽)으로 추정되는데, 집강소 시기였던 7월 19일에 부안 도집강(都執綱)에 임명되었고, 그의 당질(堂姪) 백계중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부안에서도 동학농민군 체포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다가 귀화(歸化)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유화책(宥和策)도 실시되었다. 즉 “우리 마을 사람이 부안 현감에게 귀화장(歸化狀)을 보냈는데, [현감이] 답하기를 ‘사악한 것을 떨쳐내고 올바름을 취하겠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특별히 용서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아는 사람이 귀화장을 대신 써 주었는데, 그것은 “최성운이 와서 귀화장을 써 줬다.”는 『홍재일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백사준을 체포하라는 명이 있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체포하였으며, 그 외숙 민(閔)도 체포해 갔다.”는 기록과 함께 “비록 동학인이라도 귀화하면 나의 양민”이라고 하며 귀화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처를 약속함으로써 동학농민군의 해산과 귀화를 유도하였다.
그러던 12월 22일, 정부군이 부안읍으로 행군한 뒤 거괴(巨魁)로 지목한 김여중(金汝中)․김명중(金明中)․모치옥(牟致玉)․임행춘(林行春)․손순서(孫順西)․손양숙(孫陽叔)․김인권(金仁權)․배홍렬(裴洪烈)․이기범(李基範) 등 9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부안읍에 들어왔는데, 성 밖으로 나가 마을에서 심한 작폐를 저질렀다. 이에 부안의 유생 수십 명과 대표가 경군 대장에게 항의하였고, 이에 사과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하였다고 한다.

박대길
부안군청/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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