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봉기도[이의주 작, 1984]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에 놀란 조선정부는 자체적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엄두조차 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일본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군을 조선에 상륙시켰다. 이에 놀란 정부군은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재촉하고, 동학농민군은 민족적 위기를 해소할 목적으로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범한 뒤(6. 21 / 7. 23) 일방적으로 청일전쟁(6. 23/7. 25)을 도발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는(6. 25/7. 27) 등 조선 침탈을 노골화하였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패배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을 배척하는 봉기가 확산되었다. 정국을 관망하고 있던 전라 감사 김학진은 전라도의 치안질서를 유지하고자 전봉준을 감사 집무실이 있는 전주의 선화당으로 초청하였다.
1894년 7월 6일, 전라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정부와 백성이 서로를 인정하며 공존한다는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입각한 ‘집강소 설치’를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이른바 민중자치가 실현되었다. 1894년 7월부터 10월까지 한시적이었고, 전라도에 국한된 지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집강소 설치 운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정국은 이와 달리 흐르고 있었다. 일본이 내세운 친일개화정권에 의해 대원군이 실각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내정 간섭이 더욱 노골화되고, 청군이 일본군에 연패를 당하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구체화되는 등 민족적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이에 전봉준과 김개남은 9월 8일(10. 6)에 서울로 올라가 정치를 개혁하고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낼 것을 결정하였다. 전봉준은 태인을 출발하여 원평을 거쳐 9월 10일경 삼례에 도착한 후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는 물론 인근 지역에서 군기(軍器)와 식량을 확보하는 등 기병(起兵) 준비에 착수하였다.
의병전쟁의 출발지 삼례에 조성된 삼례역사광장.
  이때 삼례에 모여 전봉준과 함께 대일항전을 결의한 인물은 진안의 접주 문계팔(文季八)․김영동(金永東)․이종태(李宗泰), 금구의 접주 조준구(趙駿九), 전주의 접주 최대봉(崔大奉)․송일두(宋日斗), 정읍의 접주 손여옥(孫如玉), 부안의 접주 김석윤(金錫允)․김여중(金汝中)․최경선(崔卿宣)․송희옥(宋熹玉) 등이었다고 한다. [위 내용은 전봉준의 재판과정에서 나온 기록이다. 최경선과 송희옥을 부안으로 기록한 것은 착오로 추정된다. 김여중은 김낙철의 다른 이름이며, 김석윤은 1895년 3월 18일 부안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전봉준은 각지의 ‘충의지사(忠義之士)’에게 함께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번 거사에 호응하지 않는 자는 불충무도(不忠無道)한 자”라는 통문을 돌리고, 9월 18일에 일본에 맞서는 의병전쟁에 나섰다.
한편, 1차 봉기와 달리 2차 봉기에는 동학 교단이 함께 하였다. 즉 해월 최시형이 9월 18일 충청도 청산에서 동학교도의 총기포령을 내림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삼례에서 출발한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이 10월 15일 충청도 논산 초포에서 합류한 뒤, 10월 21일 공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처럼 전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의병전쟁에 나설 때, 김낙철을 중심으로 한 부안의 동학농민군 역시 의병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대일항전에 나섰다. 그 당시 부안에서 함께한 지도자로 김석윤․신명언․강봉희․신윤덕․이준서․신규석 등이 전한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 (전략) 김성서와 더불어 외요촌 백원장의 집에 가서 들으니, ‘각 읍 접주가 모두 기군기포(起軍起包)하고, 본 읍의 도소를 읍내 작청(作廳)에 다시 설치하였다. 사통(私通)이 도착하였는데, 각 접주는 금일 저녁 전에 기포하여 창검(槍劍)하고 아주 빠르게 모이라.’고 하였다. (중략) 각 읍에서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고로, (하략)”[『홍재일기』 1894. 9. 15], “도인이 상서 장전평에 모였다고 들었다.”[『홍재일기』 1894. 9. 19], “방금 동학인이 모두 읍전동의 교련사습터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 가서 보니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저녁 무렵에 해산하고 갔다.”[『홍재일기』 1894. 9. 22],
이처럼 부안에서도 의병전쟁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안 대접주는 김낙철은 호남과 호서지역 동학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한 논산으로 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부안에 남아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부안은 전란(戰亂)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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