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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학농민혁명사 24>집강소 시기 부안 ②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20.01.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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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의 선산인 밀양손씨 묘역[부안읍 봉덕리 쟁갈 마을]
부안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운영된 시기와 운영에 관한 기록은 부안 대접주였던 김낙철(金洛喆)이 남긴 「김낙철 역사」와 그 동생 김낙봉(金洛鳳)이 남긴 「김낙봉 이력」, 그리고 주산면 홍해 마을에 살던 기행현(奇幸鉉)이 남긴 『홍재일기(鴻齋日記)』를 통해 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 다른 자료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나 이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김낙철 역사」에 의하면, 부안에 집강소가 설치된 시기는 1894년 4월 1일이다. 즉, 
“그 때에 부안 군수 이철화가 향유(鄕儒․지방 향촌의 유생) 및 이호(吏戶․이방과 호장)와 상의하고, 여러 차례 와서 요청하기를, “고을 일이 어떤 지경이 될지 알 수가 없으니 들어와서 성(城)을 지켜 외적(外敵)을 막아 달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갑오년 4월 1일에 도인 수백 명과 함께 서도(西道) 송정리(松亭里)에 있는 신씨(辛氏) 재각(齋閣)에 가서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그 때 군수가 향촌의 유생 및 이호(吏戶)와 함께 [집강소 설치운영에 따른 비용을] 경내의 호(戶)에 배정하고 난 뒤에 다시 부민(富民)인 요호(饒戶)에게 배정하였다. (중략) 동생 낙봉은 신소능(辛少能)과 함께 부안 줄포(茁蒲)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김낙철 역사』 갑오(1894년) 4월
부안 현감 이철화가 부안지역의 유생(儒生)은 물론 부안 관아의 이방과 호장 등의 아전과 상의한 뒤에 김낙철에게 성으로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막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김낙철이 동학인 수백 명과 함께 현재 행안면 역리에 있는 송정 마을의 영월신씨 재실[신원재]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부안 현감이 부안지역의 유생과 부안 관아의 아전과 함께 관내의 민가에 배정하였고, 뒤이어 부안에 거주하는 살림이 넉넉한 부자들에게 배정하였다. 또한 동생 김낙봉과 신소능으로 하여금 줄포에도 도소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김낙봉 이력」에 기록되어 있는데, 도소 운영에 필요한 예산은 부안 현감과 아전, 그리고 유생들이 나서서 1가구마다 쌀 1말씩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집강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많고 적음을 떠나 부안 사람들이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월신씨 재각 신원재[행안면 역리 송정 마을]
  부안에 도소를 설치한 시기가 4월 1일이라면,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 설치운영 시기를 앞당기게 된다. 이때까지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은 고부봉기 이후 3월 13일 무장으로 이동한 뒤에 3월 20일에 이른바 ‘무장기포’를 하고, 3월 23일에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한 뒤에 3월 26일에 백산대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혁명을 시작한 지 불과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때이다. 더욱이 이때까지 동학농민군이 실질적으로 점령한 지역은 고부뿐이었고,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 1주일 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안 현감과 아전들, 부안의 유생들이 먼저 솔선하여 김낙철에게 질서유지를 요청하였고, 김낙철은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도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이 내용은 그 당시 줄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쓴 「전라도고부민요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의 변란(變亂)으로 뜻밖의 요행을 얻은 것은 부안의 지방민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이래 오로지 민심을 진정시키려고 각종 세금의 독촉을 중지하고, 송사(訟事)의 재판도 멈추어 백성들에게 알랑거리는 것 같았다.”라고 하여 부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보다는 사전에 예방하는 방향으로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부봉기 이후 조병갑의 도주와 후임 군수 박원명이 부임하기 전까지 부안 현감이던 이철화가 고부 군수를 겸임하면서 사태의 수습에 나섰던 경험이 작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고부봉기의 원인과 사태의 해결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철화가 취한 방법이었다.
신원재 현판
  김낙철이 부안에 도소를 설치한 이틀 후인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이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을 이끌고 부안으로 들어와 군수 이철화를 질책하며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때 김낙철이 손화중의 선산이 바로 김낙철이 사는 쟁갈 마을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달래어 이철화가 화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김낙철은 무력으로 부안 관아를 점령하지 않았다. 대신, 부안 현감과 아전, 그리고 유생들의 요청을 수용하여 도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급진적인 사회변혁보다 점진적인 변혁을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동학농민혁명 기간 부안에서는 관과 유생, 그리고 혁명군 사이에 관민상화(官民相和)가 이루어져 민중자치(民衆自治)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홍재일기』에서는 “동학이 본 읍에 도회를 두었고(6. 27), 서도 한 곳에만 도소를 두지 않고 도인을 각 면의 훈집(訓執)으로 삼았다(7. 8), 본촌 도인이 사거리 도소에 갔다 와서 전 이방 신정식이 도소로 붙잡혀 갔다고 전하였다(7. 8). 각 읍의 접주들이 군사를 일으키고 본 읍 도소를 읍내 작청(作廳)에 다시 설치하였다는 말을 들었다(9. 15),”는 것처럼 극심한 갈등과 불화, 이에 따른 보복 등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관민상화의 민중자치가 실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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