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집강소 실시를 합의한 선화당[전라 감영]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최초의 ‘민중자치’로 알려진 1894년 ‘집강소 시기’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단정 짓는 게 쉽지 않다. 이유 중의 하나는 1894년 5월 8일(이하 양력 6. 11) 전주성 철수와 같은 해 7월 6일(8. 6) 전라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전주 선화당[전라 감사의 집무실]에서 만나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입각한 ‘집강소 실시’를 약속한 날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언제부터인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5월 8일을 두고,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이 협약을 체결한 ‘전주화약’이라는 용어를 부여하고, 이를 계기로 민중의 자치가 시작되었으며, 7월 6일에 전라 감사에게서 공인을 받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민중자치의 집강소는 5월 8일부터 시작되었고, 7월 6일에 전라 감사에게서 공인을 받았으며,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준비하는 9월 10일(10. 8)까지 실시된 것으로 정리된다.  
더불어 전라도 54개 군현 모든 지역에서 실시된 것으로 정리하는 연구가 있다. 반면에, 전면적으로 실시된 지역과 관(官)과 동학농민군이 협력적 관계에 맺고 실시한 지역, 그리고 아예 실시하지 못한 지역으로 나누어 보다 자세하게 구분하는 연구도 있다. 또한 ‘집강소’라는 용어 역시 이때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방조직에서 이미 사용하던 용어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앞서 말한 실시 시기와 실시된 지역, 그리고 집강소라는 용어마저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최초로 실시되었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 또는 실시’라는 의미를 갖는 민중자치에 대해서 이처럼 여러 의견이 공존하는 것이 불합리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은 보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집강소 기록화[이의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4월 27일(5. 31)부터 전주성에서 철수하는 5월 8일, 그리고 전라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만나 집강소 실시를 약속한 7월 6일까지, 11일간과 60여 일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주성 점령에서 철수까지의 10여 일은 동학농민군이 승전의 기쁨과 함께 패전의 아픔을 함께 갖는다는 게 일치된 견해이다. 즉 전주성 점령이라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와 함께 완산전투에서의 잇따른 패배가 공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집강소 실시’보다는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의 일방적인 지배와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서의 관권의 우위가 공존하였다. 따라서 7월 6일 이후 실시된 전면적인 집강소 시기와 구분된다.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관민상화의 집강소 실시를 약속한 7월 6일까지 60여 일 동안 관권(官權) 통치와 민중자치가 전개되었다. 즉 정부의 전라도 전역에 대한 통치력이 불안전한 까닭에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협조적 관계를 통해 간헐적으로 미치고 있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온전히 미치는 등 여러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를 지나 7월 6일부터 형식적이나마 전라 감사의 공인을 받은 동학농민군이 관권과 협치(協治)하면서 질서를 유지하는 집강소 시기가 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통치력이 불완전하고,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였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던 시기, 5월 22일 전주에 도착하여 5월 26일까지 태인․고부․부안․김제․금구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정탐한 일본인 경부(警部) 오기하라(荻原秀次郞)는 “동학의 잔당이 각지에 출몰한다는 풍설이 있을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처음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사람 가운데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않은 무리들이 패주 후에도 따로 생계의 방도가 없으므로 계속 각처에서 도적질이나 기타 부정한 행위를 하고, 동학농민군이라 자칭하면서 여행자나 양민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는 동학농민군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전주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진압된 것으로 오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6월 4일에는 “부산에 머물고 있는 우리 상인 히다카 토모는 올해 6월 8일 밤 전라도 위도(蝟島)에서 동학당의 공격을 받아 배에 싣고 있던 화물과 한전(韓錢) 등 일체를 약탈당하고, 간신히 7월 20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다음달 21일 본인이 부산의 영사관에 와서 말하였습니다. 위도 안에는 당시 400여 명의 동도가 잠입해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라는 보고가 있다. 이를 통해 부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6월 5일에는 “근래에 동학인이 민가(民家)에 들어가 의관(衣冠)과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고 한다. 동학인이 도처에서 횡행하는 데 방백과 수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민(富民)이 먼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오늘 밤 황혼 후에 홀연히 화광(火光)이 충천하였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이 관권(官權)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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