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전승비

3월 26일(5. 1) 백산대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한 동학농민군은 4월 7일(5. 11) 고부 황토현전투와 4월 23일(5. 27) 장성 황룡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4월 27일(5. 11)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조선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정부는 물론 동학농민군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다.
백산대회 이후 혁명군의 동정에 대해서 『홍재일기(鴻齋日記)』는 “우리 동네에 사는 동학인 박문표(朴文表)가 왔다. 본 읍의 여러 가지 일들을 물었더니, 왕명(王命)을 받고 출동한 정부군(京兵)과 전라 감영군(營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하여 사기가 충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군이 출정하는 것을 가서 봤다. 진세(陣勢)는 극히 엄정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황토현전투 이후에는 “고부접전(古阜接戰․황토현전투)에 대해서 다시 들으니 동학인 중에서 사망자는 한명도 없고, 전라 감영군 사망자는 백 여 명이라고도 하고 천 여 명이라고도 한다. 동학인이 지나간 곳에는 살아있는 풀 한포기 밟지 않고 살아있는 벌레 한 마리 죽이지 않았는데, 감영군이 지난 곳에는 잔멸(殘滅)하지 않은 게 없다고 한다.”고 하여 군율(軍律)이 매우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사람은 물론 생명존중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황토현과 황룡에서 승리를 거두며 북상하던 4월 22일(5. 26) “부안 현감이 군수전(軍需錢) 300냥과 소 2마리를 초토사(招討使)가 있는 곳에 실어 보냈다고 한다.”고 하며, 5월 3일(6. 6)에는 “본 읍(부안현)에서 소 2마리와 짚신 200접을 홍[계훈] 대장에게 보냈다.”는 기록, 이와 함께 동학농민군의 색출과 검거, 그리고 진압을 재촉하는 초토사의 지시가 하달되는 것으로 보아, 전주성 함락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의 행정과 치안은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5월 3일 전투가 벌어졌고, 동학군 사망자는 600여 명이었고 정부군 사망자는 16명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3일 전투에 대해서 다시 물으니 동학군 사망자는 1천여 명이었다.”고 하여 전주성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월 8일,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철수에 대해서는 “갑자기 동학군이 부안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동네에 사는 동학인 박문표가 전주부중에서 내려왔다. 홍 대장과 더불어 화친(和親)을 하고 해산하였다고 한다. 동학군 전주 사망자는 불과 50명이라고 한다.”고 하여 전주성 전투 당시 동학농민군의 사망자 수가 1천여 명에서 50명으로 편차가 크고,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배경은 지금까지 알려진 ‘화약’이 아니라 ‘화친’이었으며,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농민군이 부안으로 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홍재일기』의 기록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시사(時事)하는 바가 적지 않다. 먼저 동학농민혁명 당시 희생자에 관한 기록이다. 전주성 전투가 벌어진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기록한 사망자는 동학농민군 600여 명과 정부군 16명이었으나, 다시 확인해 보니 1천여 명이었다. 그런데, 전주성에서 돌아 온 같은 마을의 동학인 박문표의 전언(傳言)은 불과 50명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편차(偏差)가 생겼는지 알 수 없으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다반사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30〜40만 명이 희생당했다는 구전(口傳)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전주화약(全州和約)에 관한 것이다. 호남의 수부(首府)이자 조선왕실의 본향인 전주가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당한 소식을 접한 조정은 가장 빠른 시간에 전주를 탈환해야 하는 절박함에 빠졌다. 이러한 조급증은 전주성이 함락당한 바로 다음날, 정식 수속절차도 없이 청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차병(借兵)을 결정하고, 그 다음날 정식 외교문서로 청국에 차병을 요청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은 이러한 정황을 조선 침략에 필요한 절호의 기회라 여겼고, 결과적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상황과 함께 동학농민군 내부도 크게 동요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투에서 연속으로 패배함으로써 사기가 떨어졌고, 자칫 전주성에 갇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위기의식 등으로 인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정부군 역시 빠른 시간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자신이 없었던 관계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입장이 반영되어 협상이 시도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사항은 신변보장과 안전귀가, 그리고 폐정개혁안의 국왕 상신(上申)이었다. 그리고 정부군은 무기반납을 비롯하여 조건 없이 해산할 경우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서로 약속하는 ‘화약’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고, 구두(口頭)로 ‘화친’을 약속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주화약’이 아니라 ‘전주성 철수’로 정리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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