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봉사가 몸에 벤 윤갑철 목사 ⓒ장정숙

“스무살의 입지 80에도 뜨거워”

값을 칠 수 없는 귀한 재산 부안군에 쾌척

윤갑철(尹甲哲)이란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그 사람이나 나나 갓 스무 살이 넘은 때였다. 부안읍내 뒤 성황산 동쪽 뾰족집 근처인지 서쪽 향교 뒤 쪽인지는 아리송하다. 분명한 것은 그때 그는 자기가 부안에 세운 사설학원의 선생이었고 나는 서울의 신문 기자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60여 년 동안에 서너 번 쯤 될까, 그런 그를 최근 석 달 동안에 세 번이나 만났다. 전에는 다른 친구들이랑 호기심으로 만난데 비해 요즈음의 잦은 만남은 내가 만나자 해서 억지로 만났다. 우리들의 만남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유별났다.

- 우리가 처음 어디서 만났는지 생각나세요?
“학원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제가 잘 아는 친구 몇 분들과 왔어요. 박기남이든가, 김석성이든가, 이택근이든가, 하여간 선배님이 이런 친구들이랑 같이 온 건 생각납니다.”
윤선생은 우리 보다 나이는 한두 살 아래지만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그는 ‘상록수’요, 시바이쳐 였다. 친구들은 부안농고(지금 부안제일고) 동기들이었다. 윤갑철이란 청년은 그 무렵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소설깨나 읽은 청년들에게는 가히 우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윤갑철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부안독립신문에 연중기획으로 쓰는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취재하는 가운데 부안군 의회 의장을 지낸 뒤 흔연하게 봉사활동을 한다는 임기태 선생을 만나 취재하는 가운데 자기가 청우고등공민학교 2회생이고 설립부터 폐교에 이르기까지 설립자로서 교사로서, 교장으로서 헌신한 ‘윤갑철 선생님’이 경찰청 경목실장으로 계시니 그분을 만나보라며 자기와의 인터뷰를 사양했다. 부랴부랴 경찰청 경목실에서 윤 목사를  만났지만 그 역시 손을 내저었다. 감투 아니고 돈 안 생겨도 이름 내는데 라면 머리빡을 쳐 박는 세태인데 이런 양반들도 있나 싶었다.

만주 간도의 어린 시절

윤갑철, 1935년 음력 10월 15일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구 26번지. 구영마을에서 태어났다. 젖먹이로 어머니 품에 안겨 만주 간도 강밀봉으로 이주 했다.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초등학교(1947,36회), 삼남중학교(1950,1회)를 거쳐 고모가 사는 영등포고등학교를 다녔다. 군대 3년 동안 육군 군악대에서 보냈다. ‘스라이 트롬본’을 불었다고 한다. 이 짤막한 소년시절만 보아도 스산한 바람 속에 내팽개쳐졌음을 알 수 있다. 정작 그 뒤 청년시절은 그가 자청하여 고생길을 택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23세의 청년 윤갑철은 남이 못하는 일 내가라도 하겠다고 팔을 걷었다.
- 고등공민학교는 어떻게 해서 하시게 됐습니까?
“먼저 3년 과정의 야간중학을 열었어요. 부안에 여중학교가 처음 생긴 지 얼마 뒤지요. 처음 감리교 교당 한쪽에서 하다가 뒤에 읍사무소(지금 군청 동쪽)공회당을 빌려서 했어요. 5.16(1961) 뒤에는 저녁 6시만 되면 경찰서 사이렌이 뚜우 불어요. 그러면 아무도 길거리를 못 다니는 통행금지입니다. 우리 아이들 팔뚝에 경찰서에서 스템프 도장을 찍어주어 학교에 다녔어요. 읍내 동중리나 서외리는 물론 저 봉덕리, 오리정 쪽에 있는 아이들까지 말이지요.”
- 학생들은 몇이나 됐습니까.
“처음 여학생만 27명인가 29명인가 됐다가 남학생도 들어오게 되어 한 반에 40~50명 되었지요. 뒤엔 200~300명이나 됐고……”
- 학교 운영 책임은 누가 맡았습니까?
“처음 신영철 어른(신기근 전 부안여중 교장부친)을 모셨다가 뒤에 정식 인가를 받을 때는 부안농고 교장을 지내신 이우정 선생님이었고.”
- 행정실장이랄까, 서무일은……
“선생님들 월급도 못 주는 처지에 무슨 그런 자리를 만들어요. 자랑 같아서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허드렛일은 전부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백묵이나 등사용지 빗자루나 걸레까지 제가 아이들과 같이 다 만들어 썼으니까. 허허!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학과 담임 자리에 부안에서는 똑똑한 인재들이 몰려왔어요. 다 현직 초등학교나 중학교 선생님들, 또 읍내 사는 공무원들이예요. 저도 국어를 맡았고”
- 혹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럼요. 읍내 신 씨들이 많아요. 신규종, 신형오, 신해근, 신수영. 곽동식, 장동석, 김우종, 거의 다 우리 옆집 친구들이예요, 부안초등학교나 중학교 선후배들이고.”
부안에 이런 가슴 뿌듯한 자랑스런‘선각자들’이 있었나.

윤선생과 김기자의 60년 만의 만남

야간 중학과정 청우고등공민학교

이들은 가난 속에 배움마저 굶주린 부안의 소녀, 소년들을 위해 용기와 희망의 불을 켜주었다. 소나무 껍질이나 풀때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옆집 부모들은 자식들을 중학교에 보냈다. 그도 못한 부모의 안타까움이 어떠했겠는가. 어느 봄날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무가 버젓이 새로 생긴 중학교에 가는데 잔심부름이나 허드렛일로 날을 보내는 어린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일제의 수탈은 해방과 함께 끝났다. 하지만 전쟁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져 수십만이 죽고 다쳤다. 한해에 100%가 넘는 고리채에 시달렸고 40~50%로 물건 값이 치솟았다. 그런 속에서 누가 가난한 소녀 소년들의 눈을 트이게 해 줄 것인가. 나라도 아니오, 읍내의 부자들도 아니었다. 몇 몇의 당찬 20대 청년들은 이를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한 일이 장하거니와 끝맺음도 범상치 않았다. 2019년 말 권익현 군수는 부안근농장학재단에 기부한 청우고등공민학교의 재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계획을 짜고 있다.
부안읍 서외리 향교 뒤쪽에 있는 4,000여 평방미터의 대지와 시멘트 블럭으로 지어진 300여 평방미터의 건물은 지난 연초까지 윤갑철과 곽동식 두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 되어있었다. 청우 학교 초창기부터 윤갑철 등과 일해 온 곽동식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에 아들 곽래형에게 유언을 남겼다. 40년 전의 뜻을 살려 이런 일을 계속할 만한 기관에 기부하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적지 않은 재산을 기쁘게 희사했다. 윤갑철은 어느 날 창업 동지의 상속자 곽래형과 기증 절차를 마무리한  임기태의 손을 마주 잡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천개의 손을 가진 ‘참수리 교회’ 목사

경목실장실 사방 벽에는 흔히 보이는 십자가나 그리스도의 성화 대신 수 천 권이 됨직한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목사의 사목실이라기 보다 학자의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1미터 76의 키에 70키로 체구인데도 말씨는 아주 조용하고 차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목사가 된지도 40년이 넘는다. 그런 그가 도무지 말이나 옷이나 거처나 기독교인 티가 안 나고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다. 아주 당돌하게 물었다.
- 목사님은 목사 티가 안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목사한테 무슨 티가 있겠습니까, 목사가 아닌 모양이지요.”
그저 웃어넘기고 마는 반응은 교회 쪽에서는 무어라고 부르는지 모르나 필자의 직감으로는 ‘도통한’ 목사답다.

윤목사가 구준히 기고하는 ‘전북아동문학’과 ‘경찰문학’의 표지

윤갑철 선생은 예수교 장로회 목사님이다. 지금 윤 목사가 목회를 하는 곳은 경찰청 안에 있는‘참수리 교회’다. 다른 지역은 경찰청이 있는 지역 이름 밑에 무슨 무슨 교회라고 부치고 있는데 이렇게 경찰 마크 ‘참수리’를 부친 건 유별나다. 참수리는 양쪽 날개가 4미터나 되는 독수리과 새 중에서도 가장 크고 용맹스런 새라고 한다. 윤 목사는 1997년 3월 경찰청 경목이 된지 얼마 뒤 이런 색다른 이름을 지어 전북 경찰과 경목의 위치를 특화했다. 어느 특정 종교를 초월하는 사랑과 용맹을 겸한 상징이다.
이런저런 과거의 악연으로 경찰에 대한 인상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서도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이때 만든 것이 경목제도였다. 경찰청 안에는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도 경신, 경승 등 각기 자기가 원하는 신앙의 터전을 갖고 있다. 전북 김제출신의 김본식 청장이 부임하자 윤갑철 목사에게 김영삼 정부의 ‘경찰과 종교’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방안을 설명하는 가운데 청으로 들어와 직접 목회를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 아이디어는 윤 목사 자신이 평소 생각해온 일이었다.
- 경목을 하신지 몇 년이나 됩니까?
“1997년 3월 27일 경목 발령을 받았으니까 23년이 되지요. 그 동안에 스물 네 명의 청장님을 모셨습니다. 현재의 조병식 청장님까지.”
- 아, 그렇게 오래 한자리에 계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아까 목사 티가 안 난다고 당돌하게 말씀드렸는데 경찰 속에서 23년이나 같이 살면서 찌든 냄새도 안 나네요, 어떻게 그렇게……
그는 목사나 경목실장 이전에 ‘영원한 시골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20대 초에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 준 것과 마찬가지로 80이 넘은 지금도 목회 못지않게 불우한 경찰 가족을 돕고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몸소 보살핀다. 그것이 일이 되었다. 그것이 천성이고 천직이 되었다고 할까. 시인이오, 아동문학가요, 여러 문인 단체를 만들고 그 책임을 맡아 키웠다. 일 없으면 꾸어 다가라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경찰청 1층 안에 수십 평의 공간을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도서관 관장이 윤 목사님 이다. 이런저런 말이 많은 곳이 경찰이오, 더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정권은 김영삼-김대중 등을 거쳐 문재인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이나 전북 경찰청의 역대 청장이나 온갖 파동을 겪었다. 비록 목회자일지언정 그 틈바귀에서 어떻게 그토록 오래 견디어 왔을까 싶다. 개인의 영욕을 떠나 이 사람이 부안사람이오, 기독교인이다.
부인 박명자 (73세)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 48세의 아들 재성은 삼성전자 부장으로 있고 47세의 딸 정선은 유아원의 원장이고 사위는 현직 경찰 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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