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과 함께 40년, 소와 함께 50년의 이영식 민주평통 부안 회장. ⓒ장정숙

“부안의 DJ시대를 연 숨은 일꾼”

영식이’ 아니면 ‘국장님’으로 40년

이영식 선생의 머리 위에 얼마 전 고희를 전후하여 큼직한 감투가 잇달아 씌워졌다. 하나는 고부이씨 대종회 중앙회장이요,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평통(平統)의 부안군 회장이다.

줏대가 있는 사람

- 옛말에 ‘50에 능참봉’이란 말이 있습니다. 능참봉도 하기 어려운 벼슬이긴 하지만 그 정도 하려면 진즉 했겠다며 시큰둥해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이런 저런 역사의 고비마다 숨은 막후로서 큰일을 해온 이 선생이 뒤늦게 이런 중책을 맡게 된 소감이 어떠신지?
“두 가지 다 저로서는 과분한 자리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을 맡게 된 연유랄까 이런 경위가 전혀 달라요. 아시다 시피 제가 뭐 남에게 ‘이렇다 하고’ 내세울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이 돌모산에 세거해온지 몇 백 년 되지요. 똑똑한 사람, 배운 사람, 좀 살림이 유복한 분들은 너도 나도 도시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어찌 어찌 하다 보니까 저는 그 마을, 그 집터에 주저앉아 연중행사처럼 닥치는 문중 심부름을 하게 된 거지요, 그러다 보니 대종회 이사도 하고 감사, 부회장도 하고 한 40년 문중 일 했으니 맡길 만하다 해서 맡겨진 겁니다.”
- 그래도 대종회 회장이 어떤 자립니까. 흔히 말하는 인격, 학식이 어떻고 간에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였다든가 누가 특별히 밀어 주었다든가 하는 거 없이는 말입니다.
“세상 평판이라는 게 묘해요. 무엇으로 공을 들이겠어요. 돈이 없는데…… 하지만 마음으로는 우리 문중이 잘 돼야겠다, 그 생각뿐이었어요. 수십 년 동안 문중 일을 챙기다 보니 노하우랄까, 요령이랄까 이런 거 자연히 알게 돼요. 그게 다른 먼 지방 일가들에게도 좋게 알려졌겠지요.”
-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라는 게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고 분쟁에 휩쓸리기 쉬운 건데 화목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어려운 일이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몸에 베이다 시피 한 게 있어요. 첫째 잘 난 채 하지말자, 실상 내세울 게 없었으니까. 둘째 남의 일에 대해 공적이든 사적이든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말자, 다 자기 주장을 가지고 있는데 제 말 듣고 자기주장을 거두겠어요? 셋째는 저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할 때 선입견이나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이런 기준이 있었어요. 저대로의 줏대를.”
- 그게 중요하지요. 줏대가 있는 사람에게 신뢰가 가는 거니까.

정부수립 50주년기념 걷기대회(새정치국민회의 부안지구당 주관) 백산성에서 새만금까지 24km 강행군. 맨 앞 기수가 이영식 사무국장.

만년 야당, 만년 국장

밖에서 본 정당이란 것은 아수라장으로 보인다고 한다. 법도 없고 원칙도 없고 상·하도 없는 집단으로 보인다. 정작 정당에 몇 년 또는 수십 년 몸담았던 사람도 좋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더구나 여·야간의 갈등이 격심했던 지난 80년, 90년대에 정치판에 몸담았던 ‘당 사람’(당인 黨人) 들은 아주 큰 소리로 말한다. “우리가 당 할 때는 이러지 않았어!”라고. 그러나 정작 정당 근 40년에 60이 넘어 군의원 한번밖에 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몸담았던 정당을 어떻게 생각할까.
“당을 처음 시작한 게 1970년대 말 이었으니까 제가 스물 몇 살 때지요. 한 5년 전 당을 떠나기까지 근 40년을 정당 생활을 했으니까, 제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당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모여들어 장바닥 같지만 그래도 거기에 질서도 있고. 훌륭한 분들을 옆에서 보기도하고 가까이서 모신 건 큰 보람이었어요.”
- 이 회장님은 야당도 하시고 여당도 하셨는데 그 분위기랄까, 이런 건 어땠습니까?
“처음 입당을 한 게 이른바 유신시대의 야당 즉 이철승, 김영삼 이런 분들이 당수이던 신민당 이었어요. 그때 선거구가 고창·부안이었는데 고창 진의종 뒤에 국무총리 의원이 이쪽 위원장이었거든요. 부안 사람에게 고창 야당을 찍으라 하니 씨가 먹히겠어요?  더구나 날만 새면 야당 간부가 갑자기 주저앉거나 저쪽 공화당 쪽으로 넘어가는 판이니 죽을 맛이지요. 실상 표가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당의 조직이나 세력은 보잘 게 없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그래도 표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맛으로 야당을 한 겁니다.”
오래 야당을 하신 분들은 이영식 하면 ‘국장’아니면 ‘의장’으로 불렀다. 평민당 때부터 야당의 원로들은 “어이, 이 국장 내가 자네 머리 깎아줄게 도의원을 나오든지 군의원을 나오든지 한 번 나와 봐!”하며 살살 불을 집혔다. 젊은 당 동지들은 이구동성으로 ‘의장님 나오세요!’, ‘의장님 나오세요!’ 간청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에이, 내가 뭐?”하며 손을 저였다고 한다.
-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어낸 ‘6월 항쟁’이나 야당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97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왕년의 부안지구당 노병들. 왼쪽부터 이석호, 박병진, 김연성, 서춘성, 이영식.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부안의 기쁨

“87년 6월 항쟁부터 97년의 대통령선거를 거쳐 2002년의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던 시기가 우리 당이나 저로 보면 ‘전성시대’였습니다. 이쪽 부안 국회의원이 이희천-김진배-정균환으로 이어지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 상당기간을 당 사무국장 또는 지구당 상임위 의장으로 있어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는 물론 군수선거나 도의원, 군의원 선거에도 직접 관여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우리 유권자들이 좋아하는지 정치는 이런 맛으로 하는구나 싶었어요.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한 부안의 기쁨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합니다. 그때는 정말 당과 민심이 딱 하나였으니까요.”
- 그 좋은 때 한자리 하시지·……
“허, 정치라는 게 자기 선전하는 거 아닙니까, 포장을 근사하게 잘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재주가 없어요. 또 제가 밀어서 당선되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어떤 정치인(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자기가 살려고 짓는 거냐고 말입니다. 저도 그런 심정이랄까 그런 거였어요. 또 옆에서 보면 성패 간에 공직선거에 나오는 사람 보면 간덩이가 보통사람보다 엄청 큰 것도 같고. 저 같은 간덩이 적은사람은 그쪽에 덤성거릴 일이 아니라고 일찍부터 단념한 거지요.”
1990년대 말, 새정치국민회의 부안지구당 고문이자 도의원이던 정진석 선생이 조용히 이영식 사무국장을 불렀다.
“내 말 잘 들어보소.”하며 말했다.
“사람은 때가 있는 법이네. 내가 보기에 자네가 한창 때여. 자네 나이로 보나 지금 후광(後廣) 김대중 선생에 대한 국민적 열기로 보나 이런 때가 다시없어, 결단을 내려 공직에 출마 해보아. 남의 일 많이 했으니까 이제 자네도 자네 일 해야지.”
간곡한 선배의 말에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하고 “며칠 생각해 보지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머뭇거렸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보다 훨씬 중요한 ‘평통 회장’자리를 20여년이 지난 고희의 나이에 수락하게 됐을까.
“저도 모르겠어요. 권익현 군수와 이한수 군의장이 그 자리를 추천한다는 말을 듣고 저 나름대로 생각해 봤어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지금 이처럼 남북관계가 꼬이고, 여야 관계가 전례 없이 뒤틀리는 상황에서는 우선 우리 부안에서만이라도 이 자리를 두고 분란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정말 이 자리를 마지막 공직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평화통일에 조그마한 기여라도 해야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수락하게 된 겁니다.”

아들 부자의 오붓한 가정. 1990년대 중반. 앞줄 부인 이행자 여사와 본인 이영식 회장. 뒷줄 큰아들 민호, 며느리 정지혜, 셋째 현호, 둘째 태호.

효자 정려가 있는 돌모산 이씨

이영식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1949년 10월 11일생, 만 70세. 아버지 이종준과 어머니 김오목 사이에 6남매 중 장남으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20년생인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당신의 아버님을 여의고 큰 아버님 밑에서 자랐다. 일제 강점기 말에 일본에 ‘모집’인지 ‘징용’인지로 갔다. 햇수로 5년인가 북해도 탄광에서 일하다가 해방 전해인지 그 해 초인지 고향 돌모산으로 돌아왔다. 탄광 노동자로 있었으니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방 전에 돌아온 것이 천만다행이었고 논 한 뙈기 없는 고아처럼 자라온 그 곳에서 번 돈으로 논밭을 사고 장가도 갔다고 한다.
“아버님은 당신이 가난하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배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만은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그런 결심이었다고 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그저 눈 뜨면 일하고 한 가지 물건이라도 아껴 쓰셨어요. 악의악식(惡衣惡食)이지요.”
부안남초등학교(1962년 졸업, 6회) 와 부안중학교(1965년 졸업, 19회)를 나오자 아버지는 큰 자식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뱃심으로 서울로 보냈다. 돌모산 이씨들의 향학열은 대단해서 고학을 시키더라도 서울로 자식을 보내는 바람이 불었다.
서울 마포 대흥동에 있는 숭문 고등학교에 입학, 한 동네에서 올라온 몇 친구들과 자취를 하며 ‘서울 놈’행세를 하기에 이른다.
- 그래 졸업은 언제 했는지, 그 다음은……
“졸업이 뭡니까. 2학년 때 퇴학 맞았지요. 촌놈이 학생위원장을 했어요. 사립학교인데다가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처음 문제가 된 것은 학생들‘삭발 문제’, 학생자치회 결의의 존중문제였는데 급기야 ‘학교까지 독재하기냐’로 번졌어요. 며칠 동안 동맹휴학도 하고 교련거부도 했는데 문제는 시말서 쓰고 부모나 친지가 학교에 와서 각서 쓰면 정학 정도로 끝날 일일지도 모를 일인데 제가 주모자요, 학생위원장인데 어떻게 아버님께 그 사정을 이야기 하겠어요.”
- 리더십이 대단했네요. 일약 학생위원장까지 하셨다니.
“제가 폼을 좀 잡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도 제 위 아저씨나 집안 형님들도 저한테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요. 거기에다 숭문고등학교 때는 다른 애들보다 나이가 두세 살 위 아닙니까. 부안중학교 거쳐 전주 고등학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거든요. 그래 한 2년을 허송하다가 서울 숭문고로 갔으니까…… 이야기 하다 보니 별 이야기가 다 나오네요.”
병역을 미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의정부에서 ‘카투사’로 복무하다 한미 합동사령부로 개편되는 바람에 한국군 28사단 백마부대에서 보낸 것도 패기만만하던 이영식의 견문을 넓히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 고부이씨 이승간 부자의 효행을 기린 정려.

불길에 뛰어든 ‘이승간’ 부자의 효행

고향에 돌아오자 지난 4~5년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변했다. 동네 이장 심부름을 10년이나 했다. 같은 시기에 부안 농협 이사로도 활동했다. 여당인 공화당의 끈질긴 입당 권유를 뿌리치고 고난 받던 야당을 택했다고 한다.
가난해도 구김살 없이 살아왔다. 부안에서 고부 쪽으로 가는 큰길가 돌모산 마을 어귀에 효자 정려가 있다. 고부이씨 중시조 ‘이승간’
李承幹 부자의 목숨 건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세운 정려다. 집에 불이 나 80 노모가 불에 탈 위기에 처했다. 60넘은 아들 승간과 40 넘은 손자는 불속에 들어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구출했으나 심한 화상으로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효행은 송세정, 나덕현과 함께 상서 감교리의 청계서원에 배형 되었다. 18세기 초 조선 숙종 때다. 돌모산 마을에는 당산이 있어 농촌의 미풍을 오래 간직해왔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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