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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학농민혁명사 18> 백산에서 황토현으로 ②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1.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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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산에서 바라 본 송정도소(빨간색 원)

백산대회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부안 대접주 김낙철의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김낙철은 동생 낙봉을 교주 최시형에게 보내 그 대응책을 물었다. 이에 최시형은 “고부에서의 봉기 역시 시대의 운이니 금지시키기 어렵다.(此亦時運이니 禁止키 難하다.)”고 하면서도 자중(自重)할 것을 지시하였다. 전봉준의 봉기를 사실상 용인(容認)내지 묵인(黙認)하면서 김낙철에게는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 것을 권고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낙철을 중심으로 한 부안의 동학교도는 독자적인 활동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동학의 독자적인 조직체계, 포접제(抱接制)가 있었다. 즉 접주와 대접주의 관계와 달리 대접주는 동학교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대접주끼리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병렬의 관계라는 특징이다.
김낙철과 동생 김낙봉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요청에 따라 김낙철은 백산대회 이후 4월 1일에 수백 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부안읍내로 들어가 서도면(西道面) 송정리(松亭里) 신씨재각(辛氏齋閣)에 도소(都所)를 설치하는 한편, 동생 낙봉과 신소능(申小能)으로 하여금 줄포(茁浦)에도 도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김낙철․김낙봉․김영조 등은 부안 일대를 장악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하였다.
이와 다른 자료에 의하면, 김낙철이 부안에서 도소를 설치한 4월 1일 ‘백산여당(白山餘黨)’으로 표현된 고부지역의 일부 동학농민군이 부안으로 갔으며, 이들은 부안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하동면(下東面) 분토동(分土洞)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500여 명이었으며, 죽창으로 무장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쓰인 붉은 깃발과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 출신 지역을 표시하는 읍호(邑號)가 쓰인 작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200여 명이 관아로 쳐들어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전라 감영에 보내기 위해 차출하여 장청(將廳)에 대기시켜 놓았던 포군(砲軍)을 모두 해산시켰으며, 4월 2일에는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분포동과 성황산, 전봉준과 손화중이 점령한 부안관아 일원 현 부안군청

부안 현감 이철화는 이들이 금산이나 태인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일이이야(一而二也) 합성일단(合成一團) 분작삼대(分作三隊) 상통성기(相通聲氣)(하나이면서 둘이 되고, 합하면 하나의 단을 이루고, 나누면 3개의 부대가 되는데, 서로 통하였다.)한다.”고 보고하였다.
부안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은 4월 4일에 ‘제중의소(濟衆義所)’ 명의로 법성포 이향(吏鄕)에게, “민간에 끼치는 폐해의 근본은 구실아치의 부정에 있고, 구실아치의 부정 원인은 탐관오리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탐관(貪官)이 범하게 된 것은 집권자의 탐람(貪婪)에 있다.”며, 백성의 고통(民瘼)을 기록한 9개조의 통문을 보냈다. 같은 날 부안의 동학농민군은 동헌(東軒)을 점령한 뒤 현감(縣監)을 구금하고 공형을 결박한 다음 군기(軍器)를 탈취하였다.
이 상황은 지난번에 언급한 바와 같다. 즉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은 동학군 4천여 명을 이끌고 부안으로 들어와 군수 이철화를 처형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낙철이 손화중을 달래 이철화가 화를 모면하였고, 4월 6일에 풀려났다. 그리고 김낙철이 손화중에게 부안을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손화중은 부안에서 호응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김낙철은 “나도 갈 터이니 진을 옮기라.”고 하며 본격적으로 동참하였다.

송정도소가 설치된 신씨재각의 「신원재」 현판

한편, 부안의 동학농민군은 4월 5일 아침에 여러 사람을 잡아다 곤장으로 볼기를 호되게[猛杖] 쳤으며, 정오 무렵에는 관아에서 부안 성황산(城隍山)으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정읍에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몰려와 부안의 동학농민군 대열에 합세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다음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4월 5일 전라 감영에서 보낸 전보에 의하면, “어제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경에 동도(東徒) 1,000여 명이 원평에서 온 뒤 본읍(本邑․부안)에 모인 무리와 합세했는데, 칼과 창이 삼엄하고 포를 쏘아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갑자기 동헌에 들어와서 본관(本官․부안 현감)을 포위하고 군기를 빼앗았습니다. 일의 형세가 황급하여 본 수령은 첩보(牒報)를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부안에서의 움직임은 바로 황토현전투를 앞둔 정황이었고, 이것은 곧바로 황토현전투에 참여하는 동학농민군의 동정이었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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