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문화 풍상 52년의 흔적은 어디에? 구김살 없는 80살의 김원철 선생 ⓒ장정숙

“황혼을 대낮처럼”

선비의 뼈대에 수학 전공한 교사

부안에 관향을 둔 부안김씨는 부안의 명문 호족 일 뿐만 아니라 인구도 첫째 둘째 갈만큼 많다. 항렬 따라 이름을 짓는 바람에 같은 이름이 유명한 사람만도 두 셋 있기도 해서 누구인지 더러 헷갈린다. ‘어디 아무개’라고 해야 이름이 특정된다. 읍내 한복판에 있는 부안 단위조합장 김원철과 전 부안 문화원장 김원철은 각기 한 자리에 오래 있은 이런 동명이인이다.

대낮이나 황혼이나

전 부안 문화원장 김원철 金源喆. 호적에는 1940년 5월 2일 생, 만 80을 바라보는 나이, 음력으로는 닭띠 1939년 5월 2일. ‘벌써’ 8순을 넘겼다. 1965년 공주사범대학 물리학과를 나오자 이듬해 66년 부안여고 수학 교사로 부임, 교감 교장을 거쳐 2002년 퇴임하기 까지 36년을 여고에서 고향 부안의 여성교육에 바쳤다. 정년퇴임이 무엇인가, 애썼으니 고된 일 그만 하고 쉬라는 제도다. 그는 아직도 써야 할 힘과 머리가 있었던지 후반 16년을  연임을 거듭하며 사단법인 부안 문화원장으로서 여력을 불태웠다. 전반 36년 6개월에 후반 16년, 그의 말대로 52년 6개월을 공직에 있었다.
사립학교든 문화단체든 오래 있기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자기가 원하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행식 교장의 강권

- 어떠세요,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여러분들이 격려해주신 덕분이지요. 열심히 일하다 보면 칭찬도 해주시고 더러 다른 말이 들려도 격려로 알고 더 열심히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모든 분들께 고마울 뿐입니다.”
1950년 부안 주산초등 졸업, 55년 부안중 졸업 (10회),  59년 전주고 졸업 (36회), 65년 공주사대 물리학과 졸업. (14회)
- 국립사대, 아주 반듯한 대학을 나오셨는데 어떤 연고로 부안여고로 오시게 됐는지.  “그때 국립대 사범대학은 서울대사대와 경북대사대 공주사대 세 개 밖에 없었어요. 부안여고에 계시던 이행식 교장께서 이런 저런 생각 말고 여고로 오라는 거였어요. 서울로 가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러자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거든요. 거기에다 전공이 물리학이니 핸디캡도 있었고…… 그래 결단을 내린 것이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지요. 그때 교감이 오이술, 교무주임이 김형주 선생이었어요.”
- 그래 바로 교사 발령을 받았습니까?
“어디가요? 선생이 남아돌 때인데다 내 전공이 물리로 되어있어 할 수 없이 ‘상치교사’로서 강사로 한 1년 있었지요. 뒤에 수학 전공을 따고 나서야 1급 정교사가 되었어요.”
우연하게도 이 사람은 김형주 선생의 뒤를 그대로 바짝 따라 붙어 교무주임, 교감, 교장의 직행 코스를 그대로 이어 받게 된다. 같은 부안김씨의 한 항렬 위인데다 전북대 농대 농업경제과를 나와 국어 교사를 맡은 ‘상치교사’의 경력 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5권짜리 ‘부안군지’중 제3권 부안 사회현황 표지

굴러 떨어진 호박 16년

- 문화원장은 어떻게 맡게 됐는지?
“부안 여고 교장을 지낸 김민성 선생이 전에 문화원장으로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이분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문화원장 깜은 김원철이 밖에 없다‘ 해서 부랴부랴 부원장 자리까지 만들었어요. 그래 이 어른이 돌아가시자 바로 문화원장 책임을 맡게 된 겁니다.”       
- 여학교 교장~문화원장 코스가 생겼군요. 문화원 예산은 거의 100% 군에서 지원하고 선임 또한 이사회에서 하지 학교와는 관계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학교 교장에 대한 신뢰랄까, 교육자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높았던 셈이지요. 또 제 경우만 하더라도 전공은 물리학과 수학이지만 우리 문학이나 우리 역사에 대한 취미가 있어서 공부를 꽤 했어요. 그때 문화원 이사들도 이런 걸 알고 있어서 여럿이 찾아와 원장 맡아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거저 된 게 아닙니다.”
김원철 원장은 수학 물리학 같은 기초 과학에 튼튼한 토대가 있는 반면 향토문화 개발과 연구에도 쉴 사이 없이 손을 썼다. 아주 꼼꼼하게 일을 처리한다.
다음 한 가지를 보아도 짐작이 간다. 필자와의 한 시간도 못 되는 이 인터뷰를 위해 그는 마치 선생이 교안 준비 하듯이 가는 볼펜으로 쓴 A4 반쪽의 자료를 내 놓았다.  호남실학의 재조명, 부안해양문화,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 문정공 반계 전우 연구, 홍재일기, 진나라 이전의 선진 先秦 유학 등 전문적인 학술대회를 부안 문화원 주관으로 열었다.

교안 만들듯 꼼꼼하게 가는 볼펜으로 눌러 쓴 문화원이 주최한 김원장의 학술대회 메모

민속자료실 만드는 게 꿈

- 아직도 건강하신데 앞으로 무얼 하실 생각이신지?
“민속자료실 같은 걸 만들고 싶어요. 조상으로부터 내려 온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이 때가 지나면 흩어지거나 없어집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쓰던 물건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편리한 걸 쫓아서 끊임없이 새 물건을 찾아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옛 것에서 향수를 느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부안은 반도의 특성으로 전주나 군산과는 물론 이웃 김제나 고창과도 조금은 또 다른 도구나 그릇을 썼어요. 이건 우리 부안 사람이 보존하지 않고 누가 보존하겠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하지만 수집하는 데도 큰돈이 들고 또 그걸 관리하는데도 엄청난 돈이 드는 건데 운영을 누가 하겠다는 건지……
“사업 주체가 누구냐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수집하고 관리하는 목적이 뚜렷하고 거기에다 관리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겠지요. 흔히 보면 수억 또는 수십억을 들여 만든 이런 시설들이 공명심으로 큰 돈 들여 만들어 놓을 뿐 ‘빈껍데기’인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 요즈음은 자나 깨나 이 ‘민속자료실’을 어떻게 만들까, 이 생각으로 가득 차요.”
얼마 전 이 양반은 권익현 군수를 만나 귀하게 보관해온 도자기 한 점을 선 듯 기부하여 화재를 모았다. 이 양반은 조상으로부터 내려 받은 이런 저런 살림 도구와 제기와 고문서 그리고 자신이 취미 삼아 모은 수 백점의 민속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이 갖고 있기에는 짐이 무겁고 어느 대학이나 자치단체는 믿음이 덜 가고, 그렇다고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에는 내 고장 부안의 향토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다는 이야기, 남의 일이 아닌 듯싶다.

타고난 복, 지은 복

김원철 선생은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591 ‘중계마을’에서 아버지 김형옥(金炯玉)과 어머니 배애현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안김씨 장군공파, 중농의 장남, 별다른 고생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안에 초등학교가 읍내와 줄포. 상서 동아실과 백산 평교 네 군데 밖에 없던 시절, 돈계에서 읍내 보다는 조금 가까운 8키로 남짓의 부서(扶西)보통학교 (지금 상서초등)를 다녔다. 어느 학교인지 한동안 일본유학을 해서 새로운 조류를 일찍 탔다. 몇 군데 공직을 거쳐 1950년대 도와 면에 지방 의회가 생기자 주산면 의회 의장 책임을 맡았다. 부서보통학교의 동창 가운데는 1950년대 말 경남경찰국장을 지낸 최병용, 1970년대에 고창군수와 부안군수를 지낸 조상훈, 부안여고 초창기부터 행정실 책임을 맡은 김용태 등이 있다.
여고 선생님은 집안 아주머니의 중매로 정읍여고를 나온 신부 채영이를 맞이한다. 정읍농업 출신인 장인 채동현은 영원면장과 고부 향교 전교를 지낸 반듯한 유가였다.

1999년 장손자 돐 때 2남 2녀의 대가족 (앞줄 왼쪽부터 아내 채영이 여사, 막내딸 선영, 장손자, 김원철 선생. 뒷줄 왼쪽부터 큰딸 정호와 큰 사위, 막내아들 태호, 큰 며느리와 큰 아들 주연.) 아들들은 회사원이고 딸들은 교사다.

보람과 아쉬움

- 교육자로서의 보람이랄까, 그리고 아쉬움이 있다면……
“한 곳에서만 오래 있다 보니 작년에 몰랐던 것을 이제 알게 되고 그걸 바로 거울삼을 수 있었던 건 큰 보람이었어요. 호응도가 달라져요. 한 가지 아쉬운 건 요즈음 교육의 본질이 자꾸 허물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거지요. 학교 폭력이라든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다든가. 어떻게 보면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나 교육 현장 전체가 참 힘든 세상이 된 것 같기도 하고……
- 문화원장으로서는?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 개발하는 가운데 대중의 관심을 넓히고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건 큰 보람이지요. 김호수 군수 때 5권으로  된 ‘부안군지’를 문화원장이 직접 기획하여 만든 건 지금 생각해도 뿌듯합니다.”
그가 문화원장으로 있던 지난 16년 동안 군수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파란은 거세었다. 최규환-김종규-이병학-김호수-김종규-권익현으로 이어진 문화원 감독권자의 변동이 어찌 문화원 운영에 미치지 않았을까. 16년 동안 그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대견 하다. 더구나 그런 속에서 문화원으로서 할 일을 큰 실수 없이 해놓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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