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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학농민혁명사 16>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백산대회 ⑤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1.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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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연이 쓴 『홍재일기』 / 동학도인 4천여 명이 백산에 집결했다는 3월 23일 일기와 동학군이 어제(26일)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는 3월 27일 일기

조선시대 전해 온 비결(秘決)에 백산은 수많은 백성이 능히 생활할만한 공간이라 하여 ‘고부백산(古阜白山) 가활만민(可活萬民)’이라고 하였다. 또한 삼면이 동진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만 겨우 사람이나 말이 통행할 수 있는 요새지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은 기름진 들판이 널리 펼쳐져 있는 옥야천리(沃野千里)로 호남의 곡창지대였다. 또한 이곳에는 해창(海倉)이 있어 세곡(稅穀) 4천여 석이 저장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47미터에 불과하지만 들판에 우뚝 솟아 있어 군사적으로 집결과 감시가 용이한 전략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러한 백산의 지리적 환경 등을 고려해서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고부봉기 때부터 백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를 거쳐 백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선언한 격문, 혁명군의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명의, 그리고 혁명군의 군율 등을 선포하며,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를 상징하여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문학적 표현이 나왔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어난 여러 개별 사건 중에서 이처럼 문학적으로 표현한 사건이 거의 없는 것을 볼 때, 백산대회를 상징하는 문학적 표현은 그만큼 백산대회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1980년대 채석으로 파괴된 백산 일부

오늘날 동학농민혁명에서 백산대회가 갖는 역사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백산은 고부봉기부터 혁명군이 주둔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 백산대회는 사발통문거사계획 → 고부봉기 → 무장기포 → 백산대회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의 정점頂點이다. 그리고 백산대회에서 • 고부봉기와 무장기포에 참여한 군중을 혁명군으로 조직하고, •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대내외에 천명한 격문, • 혁명군이 지향하는 바와 목표를 분명히 밝힌 사대명의(강령), • 혁명군이 지켜야할 규율을 명시한 12개조 군율 등을 선포함으로써 •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데,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만 ‘백산대회’가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한 때 그 실체를 부정당하고,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더 나아가 2012년 교육방송(EBS-TV)에서 제작한 동학농민혁명 다큐에서는 무장기포에서 바로 황토현전투로 넘어가는 등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처럼 백산대회의 실체가 부정당한 이유는 동학농민혁명 선언문에 해당하는 ‘백산 격문’이 1894년 당시 작성된 문장(文章)이 아니고, 사대명의는 백산이 아니라 무장에서 발표되었으며, 12개조 규율(군율) 역시 백산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백산대회가 이처럼 실체를 부정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의 동학농민혁명 말살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말살하려는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부의 백산을 1914년에 부안 백산으로 분리시켜 지역민의 무관심과 분열을 조장하였다.
이에 따라 오랜 동안 백산은 외로운 섬처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68년 정읍에서 ‘갑오동학혁명기념문화제’가 백산대회에 맞추어 개최되었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4회부터 황토현전승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정작 부안에서 백산대회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0년이었는데, 그것도 부안군 차원이 아니라 백산면 차원의 면단위 행사였다. 이로 인해 백산대회 기념행사는 부안군이 아니라 백산면 행사가 되었다. 2010년 이후 백산면에서 부안군으로 확대하여 해마다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지만, 관심이나 규모에서 볼 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진강에서 본 백산

그나마 백산대회에 관한 부안의 관심이 이어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제정과 관련하여 백산대회가 포함되면서부터이다. 한 때 실체마저 부정당했던 백산대회가 법정기념일 후보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학술대회 등을 통해 꾸준히 백산대회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알린 결과였다.
한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백산에서 가까운 홍해 마을에 살던 기행연이 쓴 『홍재일기』를 통해 백산대회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다. 특히 백산에 집결한 군중에 대해서 3월 23일(3. 28)에는 ‘동학도인’으로, 3월 27에는 ‘동학군’으로 표기함으로써 3월 26일 개최된 백산대회를 통해 동학도인이 동학군으로 편재되었고, 이로써 본격적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민선 7기 들어 「백산성 성지화사업」과 함께 「부안 백산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한때 백산대회 실체가 부정당했던 사실을 교훈 삼아 백산대회의 위상에 걸 맞는 내실 있는 사업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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