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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 사람39>부풍율회 사무국장 김용구 (金容九) 선생
석암시조의 맥 이으려는 춘포 김용구 선생 ⓒ장정숙

“석암 정경태 선생의 맥을 이어”

무형문화재 다섯 가운데 셋이 부안사람

시조 하면 70년 전에도 부안이오, 오늘에도 부안을 꼽는다. 일제 강점 아래서 맥이 끊어지다 시피한 우리 시조를 누구나 알 수 있게 현대적으로 총 정리한 시조 명인이 주산면 사산출신 정경태 선생이오, 그 뒤를 이은 백강 고민순, 오당 김봉기가 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나 고창에 비해 조금은 초라하게 보이는 부안 시장 서쪽 ‘매산매’ 언덕에 있는 ‘부풍율회’ (扶風律會)는 이래서 뻐길만하다.
시조 읊는 소리가 마치 옛날 서당의 글 읽는 소리처럼 강당 안팎으로 낭랑하게 퍼진다. 취미로도 선비의 기풍을 느끼게 하거니와 시조부문 문화재의 월계관을 따려는 욕망이 피를 말리는 정진을 강요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춘포(春圃) 김용구 선생 (1955년 생, 64세)이다. 그는 늦게 시조에 입문했다. 늦게 배운 재주,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력투구의 단기 연마랄까.

춘포선생의 정가 공연

시조 좋아 부안으로

춘포는 시조가 좋아 시조 스승을 찾아 익산에서 아예 부안으로 이사한 억척스런 사람이다. 그는 익산에서 커서 이리초등학교와 원광중, 익산 고를 나왔다.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싶어요. 아버님이 소리꾼이었어요. 이리 그쪽에서는 알아주는 예인이셨어요. 하지만 제가 그런 길로 가리라고는 생각 못했지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듣던 말이 자꾸 떠오른단 말입니다. 박동진, 안숙선, 오정숙 이런 국창들이 부안 오셔서 노래 한번 부르지 않으면 문화재 못된다고 했어요. 그만큼 부안은 노래하는 사람이면 동경하는, 가서 배우고 싶은 예술의 고향 이었어요.”
- 그래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시조를 배우게 됐습니까.
여기 저기 시조 배우러 다니다 이렇게 배워가지고는 안 되겠다,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뵙고 제대로 배워야 겠다 해서 간 곳이 전주였어요.
오당(梧堂) 김봉기 선생님을 뵙고 간곡하게 선생님 문하로 입문하겠다는 제 뜻을 여쭈었습니다. 오당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하나 밖에 없는 가사보유자로서 석암 정경태 선생이 창안한 독특한 창법을 전수하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2013년, 쉰여덟 살, 늦어도 한창 늦은 때지요. 그때 제가 시조부문 대상(도지사상)을 받았습니다. 아, 열심히 공부하면 나이는 별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예 선생님을 찾아 나선거지요. 그런데 또 욕심이 생깁디다. 제대로 공부하자면 아예 석암 선생이 나신 주산으로 집을 옮겨야겠다, 석암 선생께서 시조를 가르치신 여기 부안 부풍율회에서 자기 공부도하고 후학들 지도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억척같이 뻘떡거렸다. 몇 년 동안 손수 차를 몰고 익산에서 전주로  부안으로 ‘시조 따라 백리길’이었다. 지금은 부안군 주산면 중공길 2 에서 혼자 산다고.
- 읍내나 아예 석암과 춘포 두 거인을 나은 사산 (衺山, 뉘영매) 으로 옮기시지 그랬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그쪽에 집을 구하려는데 마땅한 집이 없었어요. 꿩 대신 닭이라고 어떻든 주산으로 터를 잡자해서 큰 맘 먹고 이쪽으로 옮겼지요.”
그의 스승 오당(87세)은 지금은 읍내 봉덕리에 살지만 소년시절은 석암과 한 동네 사산에 살았고 석암과는 가까운 인척이었다고 한다.
마침 춘포가 오당문하로 들어간 지 3~4년 사이에 춘포의 전북 시조계에서 활동은 눈부셨다. 2015년과 16년 도무형문화제 14-1호 시조 공개 행사에 지도 참여하고 김봉기 선생의 보조 지도 강사로 있으면서 ‘석암제 12가사’ 씨디(CD) 음반을 내놓았다. 가사의 개인발표회를 여러 차례 한데 이어 ‘석암 가사의 전수자’로 지정을 받았다. 석암-백강-오당으로 이어지는 가사 인맥이 춘포로 공인된 셈이다.

석암의 선율악보

등잔 밑은 어둡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전국적인 큰 인물도 그 사람이 난 고향이나 성장한 고장에서는 대단하게 알지 않는 것이 세태다. 우리나라 시조를 현대화한 시조 대가요, 전라도 가사의 제1인자인 석암 정경태 선생의 경우도 그 예외가 아니다.
- 석암 선생이 어떤 분입니까?
“이 어른은 시조만 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경서에도 밝으시고 시와 서예도 아주 대단하신 분이지요. 우리가 이 어른을 존경하는 것은 그저 현대 시조의 창시자로 그치지 않고 당신 한 평생 거의 끊어지거나 몇 사람이 취미로 좋아하던 이 땅의 예맥 가사부문을 전라도 하고도 부안 여기에서 꽃피웠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석암 정경태 선생

석암 정경태 (石菴 鄭坰兌 1916-2003) 선생이 어떤 분인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김경배 선생은 아주 짤막하게 다음과 같이 석암의 업적과 풍모를 전한다.
“석암 선생은 시조를 보급하는데 정열을 기울였다. 시조를 배우는 초심자를 위하여 선율악보를 창안했다. 이 책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시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정서가 되었다.”
이 책에 대한 인상은 아주 극적이다.
“1950년대 말 경기도 안성 땅 어느 풍류방에서 나는 석암 선생의 ‘선율보’를 보았다. 마치 옛날 관공서의 지적과에서 찍어 낸듯한 푸르스름한 종이 위에 세로로 선율을 긋고 꼬불꼬불한 요성 표시 밑에 꼼꼼하게 시구를 달아놓은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시조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생전에 보유하시던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보에 이르기까지 선율보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선율시조보’는 구전심수로 가락을 익히던 과거의 시조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고 대중성을 갖게 하는데 큰 몫을 했다. 이 선율보는 시가 발전사에 새로운 지표를 남겼다.” 

필자는 국악이나 시조는 물론 어디 가서 노래 한 자리 부르라면 자취를 감추고 마는 음치요, 문외한이다. 그런데도 판소리나 시조는 그럴듯한 느낌이고 시조 대가 정경태 선생은 1950년 겨울 바로 그 집 당신의 생가에서 뵌 일이 있다. 국회에 있을 때인 80년대와 90년대에도 가끔 뵈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인물인줄 그때는 몰랐다. 뒤늦게 새삼 부끄럽다.

하고 싶은 세 가지

- 하시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한 서너 가지……
“첫째는 이 부풍율회에서 공부하는 많은 시조 애호가를 위해 불편한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지요. 이것은 제가 사무국장으로서의 책임이기도 하지요.  둘째는 석암 선생의 시조 전수자로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선생의 계보를 잇는 무형문화재가 되도록 정진하는 겁니다. 그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힘이나요, 피곤한 줄 몰라요. 셋째는 이건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 할 일인데 그건…… 다 알면서도 너무 거창한 일이어서……”
- 말씀해보세요.
“석암 선생님 일인데 다른 거 아니고 석암 선생님 생가를 복원해야 합니다. 그 분 개인을 추모하거나 유족을 위해 복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화 예술을 말하면서도 문화인이나 예술인들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활동했는지 에는 소홀한 듯해요. 근래에 여기저기 좀 먼저 깬 지방에서 문화 예술인들에 대한 관심이 그나마 높아진 건 다행이지요. 꾸어다 가라도 동상도 세우고 생가 복원도 하지 않습니까. 정경태 선생이다, 조남철 선생이다 하는 분들이 어디 보통 분들입니까. 전국 어디에다 내놓아도 그 방면의 첫째가는 분들 아닙니까.”

페허가 된 석암의 생가

석암선생 생가 복원은 생가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큰 어려움이 없는데다 그 주변 몇 천 평을 여기에 부처 석암 시조를 재생하는 시설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석암묘소나 부풍율회, 무형문화재전수관 등을 세트화 한다면 시조문화의 부흥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다. 

부풍율회 입구에서 김기성 회장과 사무국장.

누가 돈을 낼 것인가. 건설비용을 거의 나라나 자치단체에 의존하다시피 하는 풍토에서는 돈 없다면 그만이기 일쑤다. 하지만 나라나 지방자치단체나 간에 투자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관광뿐만 아니라 산업 까지도 견인하는 구실을 한다. 선인들이 이루어낸 큰 업적, 조상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마침 부풍율회의 김기성 회장을 아침 일찍 부풍율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의원이 여기까지 다 오시고…… 뭐 좋은 소식 있습니까?”, “강남 갔던 제비 흥부 집에 박씨 물고 오듯이 시조의 대본산 부안 땅에 시조 가락이 넘쳐날 그럴듯한 전당이 세워졌으면 싶다”고 했다.
오늘의 주인공 춘포 김용구 선생의 선대는 백산 용계리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가산이 기울어지자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이리로 나가 거기에서 결혼, 3남 2녀를 두었다. 춘포는 막내다. 그는 말년에 돈 보고 부안에 온 것이 아니라 시조 배우러 고향땅을 혼자서 다시  밟았다.
- 혼자 사신다는 데 외롭지 않으세요?
“많이 살았어요. 시조가 있잖아요. 시조 좋아 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
그에게는 확실한 내일이 있었다. jbk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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