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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학농민혁명사 15>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백산대회 ④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1.0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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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포동에 있는 부안김씨 재실[분포재]

고부에서 시작된 거사는 무장을 거쳐 백산에서 혁명군으로서 위상을 갖추었다. 그것은 격문(선언문)과 4대명의(강령)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백산에서의 출정식이 일반 민란(民亂)이나 반란(反亂)이 아닌 백성과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혁명군이 지켜야할 12개조 규율(군율)이다.

• 12개조 규율[군율]
①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②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③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④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⑤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⑥ 굶주린 자는 먹인다.
⑦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⑧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⑨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⑩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⑪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⑫ 불효자는 죽인다.
위의 조항은 우리들이 거행(擧行)하는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옥(地獄)에 가둘 것이다
.

12개조 군율은 4대 명의 중에서 첫째 항목[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과 둘째 항목[충효(忠孝)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즉 생명존중을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와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적 윤리를 강조한 것으로, 혁명군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는 전봉준이 각 부대장에게 당부한 4개 약속과 같았다. 즉 “동도대장(東道大將)은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언제나 적을 대할 때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큰 공으로 삼겠다.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 인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행군할 때는 절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효제충신(孝悌忠信)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면, 그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말기 바란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백산대회에 참여한 혁명군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각기 다른데, 일반적으로 8천명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 기록된 접주급 이상 참여자들을 참고로 해서 참여 인원을 파악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백산대회에는 34개 지역이 참여하였고, 대장소를 제외한 지도급(접주) 인물은 160여 명에 달하였다. 그 당시 동학의 접과 포 조직에서 접이 대체적으로 200호(戶)가 기준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접주 급 160여명에 200명씩 참여한 것으로 해서 3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행연이 살았던 홍해마을과 도소봉, 그리고 부안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분토동과 백산

백산에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군량미(軍糧米) 확보는 물론 전열을 정비한 혁명군은 일부를 백산에 남겨두고, 3월 말경 전주 점령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혁명군은 백산을 중심으로 태인․부안․금구․무장․고부․정읍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동학교도와 농민이 주축이 되어 이웃하고 있는 고부의 백산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안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 『홍재일기』는 “대란(大亂)의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장정을 모집하였으나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민심이 심하게 흔들렸다. 도소봉[부안읍 신흥리 산 36-1 승암산(도소봉)에서 백산까지의 거리는 약 7.7㎞이다))에 올라 멀리 장갈리[쟁갈리]를 바라보니, 김여중[김낙철]이 수백 명을 모아 분토동 김씨 재실에 둔취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분포동[부안읍 모산리 모산마을]

다른 자료는 “고부군 백산의 남은 무리가 본 읍에 살고 있는 그들 무리를 충동하여 하동면 분토동에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거의 500명쯤 되었는데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고, 붉은 깃발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라고 하여 백산대회를 계기로 하여 부안의 동학농민군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부안 동학농민군의 분토동 집결과 이후 부안 관아 점령 등을 이끈 인물은 부안 대접주 김낙철이었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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