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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 사람37>판소리 명인 홍석렬 洪錫烈 선생
고수로서는 최초의 명인 홍석렬 선생

“추담(秋潭) 선생에게서 북치는 법 배워”

DNA는  국악쪽인 모양

희한한 추담 석비제막

추담 홍정택 선생을 아십니까. 열 사람 가운데, 백 사람 가운데 이 사람이 누구인줄 모른다 해서 창피할 일이 아니고 더구나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라  해서 만인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유명한 사람이라 해서 만인이 추모하는 것은 아닌 것이 세태이니까요.
어떻든 ‘판소리 명창’추담 秋潭 홍정택 선생을 기념하는 전국 국악 경연대회가 부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이에 앞서 보안면 우동리 반계 유형원 선생 유허지 쪽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 왼쪽에 있는 ‘인간문화재 유물관 ’앞에 이분의 石像을 세웠다. 
추담 판소리 보존회가 주관한 이 행사는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경연대회는 13회째지만 동상이든 석상이든 진즉 세웠어야 할 제막 행사가 늦게나마 이루어진 것은 부안의 경사요, 예술인에 대한 당국이나 보존회의 소원이 어렵게나마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제막 행사가 간소하다 못해 초라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행사에 이름을 올려놓은 기관이나 단체는 대한민국 국회부터 시작해서 문화관광부, 교육부, 전라북도, 전북도교육청, 그리고 부안군과 부안군 의회, 부안교육지원청 다음에 예술단체 이름이 쭉 나온다, 예총전북지회와 부안지부, 국악협회 전북지회와 부안지부. 부안군의회 의장이나 의원들이 아니었다면 앞자리 앉힐 사람 소매를 끌어당겨야 할 처지였다. 왜 이토록 초라해졌을까. 이 행사에 국회나 정부 부처가 돈을 냈는가, 축하하는 사람이 왔는가. 심지어 거의 전적으로 수 천만 원의 돈을 낸 부안 군수나 석상을 조각한 조각가마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100명도 안 되는 손님들 가운데 동호인이나 주민들은 뜸 했다. 판소리 보존회장과 문화관광 과장이 분주할 뿐!

판소리 명인 추담 홍정택 선생 석상 (김오성 조각)

 부안이 낳은 판소리 수궁가의 제1인자

판소리 가운데서도 수궁가로 전국 제1인자로 국창 칭호를 받은 추담 홍정택 선생(1921-2007)은  부안군 부안읍 신흥리에서 태어나 주산초등학교 (그때는 주산보통학교)를 뒤 늦게 나오자 바로 가설극장의 ‘창극단’에 눈이 번쩍 띄었다. 열일 곱 살의 소년은 그 무렵 우리 국악계를 휩쓴 송만갑, 임방울, 조몽실, 박초선 등 명창들의 소리를 귀담았다.
선생은 무대와 강단에서 그리고 국악과 판소리 분야에서 치열하게 활동한 사람이다, 주 무대가 전주를 비롯 전국 여러 곳이면서 말년에는 고향 부안에서 판소리를 전수하는데 전념했다. 척박한 예술 풍토에서 그나마 예맥을 이어온 부안 땅을 판소리의 메카로 만들고자 애썼다.
선생의 혈족이나 후계자 가운데서 북 치는 고수로 명인(名人) 이 된 홍석렬 (洪錫烈) 선생을 여기에 등장케 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 어떻게 해서 추담선생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선생님은 명창일 뿐만 아니라 참 난다 긴다 하는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셨어요. 저는 늦게 늦게 40이 다 되어서야 선생님 문하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거 북 치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거기 폭 빠지게 되데요. 한 2-3년 공부 했는데 선생님 창 하시는 고수를 하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대가의 창을 ‘초보’가 북을 칩니까. 선생님이 떨지 말고 한번 재주를 네 마음대로 펴 보라 해서 했지요. 저는 떨려서 어떻게 북을 쳤는지 식은땀이 죽 흐르는데 선생님께서 아주 잘 했다고 칭찬해주시고 다른 고수들도 놀랐대요.”
- 고등학교 (부안 제1고 18회 축산과) 나온 지 20년 뒤에?
“네, 그쯤 될 겁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집안 형편이 괜찮았거든요. 대학 간다고 전주로 튀었는데 기타학원에 다녔어요. 기타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몇 달 지나 밤무대에 나가기도 하고……”
- 음악 소질이 대단했던 모양이네요.
“네, 고등학교 다닐 때 집안 아저씨가 기타를 갖고 계셨는데 어린놈이 금방 배웠어요. 읍내 동중리 지금 동부 터미널 근처에 기타 학원이 있었는데 거기 다녔어요. 공부만 빼고는 뭐든지 하면 1등 소리 들었으니까…… 그래 기타 선생이 넌 대성하겠다며 전주 가서 더 공부하라는 거예요.”
홍석렬 명인은 기타 연주로 이름이 났다. 하지만 기타로는 어쩐지 양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DNA가 역시 우리 국악, 특히 판소리에 맞았던 모양이지요. 우리 부안 출신 명창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고……” 갑자기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온실 속 공연장

전국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

홍석렬은 드디어 2003년 11월 4일 전주에서 열린 전국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명인’으로 등극 한다. 고수로는 명인 1호였다. 2014년엔 대한민국 명인회에서 ‘기타명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 흔히 ‘일명창 이명인’이라고도 하고 ‘일고수 이명창’이라고도 하는데 소리와 북은 어떤 관계입니까.
“사람들이 소리하는 사람을 더 알아주니까 북치는 사람도 알아주어라 해서 일고수 (一鼓手) 소리가 나왔겠지요.”
판소리는 우리 한국, 특히 전라도 지역에만 성한 국악 장르다.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등의 무대가 전라도여서 전라도 사람의 목 구녕이 아니면 제대로 그 맛을 살리기 어렵다는 것. 마치 서양의 음악 공부를 하는데 그 나라 발음을 제대로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판소리의 위상을 크게 높인 박동진 명창은 1980년대 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초년의 고통을 회고했다.
“전라도 발음 공부 하는데 꼬박 10년은 걸렸을 것이여.”
그가 누구인가. 여덟 시간 동안 물 한모금 안마시고 화장실 한번 안 가고 처음으로 춘향전을 완창 했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대전중학교 1학년 때 써커스 단과 함께 온 판소리 공연을 몰래 보고서 어떻게 가슴이 뛰는지 ‘학교고 지랄이고 내팽개치고 일주일 내내 따라다녔다’는 그다. “여보시오, 기자 양반 그게 어디 사람의 소리요? 귀신 소리지!” 판소리 입문 50여년 뒤 기자에게 뱉어낸 당대 최고 명창의 회고가 뒤늦게 판소리 고수로 명인이 된 홍 명인 앞에서 불현듯 스쳤다.
- 좀 무식하게 여쭙자면 고수는 지휘자로 보아야 합니까, 반주자나 응원꾼으로 보아야 합니까.
“글쎄요. 일심동체지요. 판소리가 특이한 것은 노래와 말 연기가 중간 중간에 구성지게 끼어들게 할 뿐 아니라 객석에서도 같이 어울리지 않습니까. 마치 요즘 댓글 달 듯이 말이지요.”
- 창하는 사람과 고수의 수입은 어떤 비율로 나눕니까?
“가령 사례금이 1,000만원 이다 하면 대개 7 대 3으로 나누지요. 고수가 명인이면 6 대 4나 반반이 되기도 하고요”
- 고수의 위상이 대단 하군요.
“북은 판소리에만 창과 궁합이 맞아요. 민요나 무용이나 시조 같은 건 장구 반주지요. 어느 악기인들 쉬운 악기가 있겠습니까마는 특히 명창에 부치는 고수는 대단하게 알지요.”
-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은?
“부안국악원에서 고법 지도를 하고 있어요. 매주 수요일. 한 10년 돼요. 여기 저기 공연이 있으면 고수로 출연하기도 하고, 한해 몇 번은 해외 공연도 나가고…… 한달 할 일, 일주일 할 일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요.”
- 대단한 체력이 있어야 하겠네요.
“그렇지요. 아침 다섯 시면 활터 (행안면 스포츠 파크에 있는 심고정)에 나가 한 30분 활을 쏩니다. 새벽 다섯 시면 여름은 벌써 동이 트지만 지금부터 한 댓 달 동안은 밖이 깜깜하고 눈발이 날리기도 하고.”
- 늦게 시작했지만 1991년부터 벌써 고수 28년, 언제 까지 북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건강이 허용하는데 까지 했으면 해요. 나라에서 명인까지 받은 사람이니 고수가 되든 후진을 가르치든 간에 제 경우는 이걸 사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예향 부안에서 태어난 것이 복이고 더구나 추담선생님 같은 훌륭하신 분의 훈도를 받았으니 이제 고향이나 판소리 발전에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는 것이 도리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 10여 년 전 그는 알콜성 간 경화에 시달렸다. 부안 홍내과 병원과 전북대 병원 김민희 박사의 치료를 받았었다. 하늘은 그가 할 일을 빼앗지 않았다.
그는 작년 까지 8년 동안 국악협회 부안지부장을 맡았었고 지금까지 8년 동안 전북연예 예술인협회 부지회장, 전북국악협회 고수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동진면 지비리 마을은 200년 전 그의 고조부 때부터 살던 터다. 지난 2008년 농장 한쪽에 200여 평의 대형 온실을 지어 수백종, 수천 분재를 키우고 있다. 그 한쪽에 10여 평 됨직한 공연장을 꾸며 놓았다. 예궁원(藝弓園} 이라는 목각 간판이 큰길가에서 행인의 눈길을 끈다. 전주 아파트에 살 때 부인이 베란다에 키우던 화분들이 아까워 모은 것이 이렇듯 볼만한 관광농원이 되었다고. “눈으로만 보세요. 주지도 않고 팔지도 않아요.”부인의 말이다.
홍 명인은 이 집에서 부인 이숙(李淑)과 단출하게 산다. 슬하에 딸만 둘,  큰 딸 경주는 출가 했고 둘째딸 민주는 대구에 있는 경북도립국악단의 아쟁 주자다. 11월 초 고창의 동리국악당에서 독주 공연이있다고. 부녀의 국악 가족이다.

예궁원 가족들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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