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미녀4총사' 통역사들. 왼쪽부터 센터장인 김은경 씨, 심진아 씨, 이혜진 씨, 최향숙 씨

지난 달 부안독립신문이 창간 15주년을 맞아 후원한 ‘전북장애인 공감콘서트’에서 이색적인 공연이 있었다. 검은 정장에 눈만 가린 반 가면을 쓴, 흡사 중세시절 가장무도회에서나 봄직한 차림의 중년여성 4명이 무대에 오르더니 ‘엄지척’이라는 가요에 맞춰 깜찍한(?) 율동을 선보였다. 관객은 열광했고 무대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이들의 율동은, 특히 손짓은 단순한 춤이라고 하기엔 뭔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수화였다. 이들은 장애인과 그 가족이 대부분인 관객과 소통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날 부안예술회관 무대에 오른 이는 수화통역사 김은경 씨와 최향숙 씨, 심진아 씨, 이혜진 씨였다.

지난 달 부안예술회관에서 열린 '전북장애인콘서트' 무대에 오른 통역사들

수화로 소통이 될까?

전북농아인협회부안지회장과 부안수화통역센터장을 겸직하고 있는 은경 씨는 2005년부터 수화통역에 종사했다. 경력으로는 최고참이다. 전부터 은경 씨를 눈여겨보던 전북도협회에서 젊고 똑똑하니 통역사를 해보라고 권유해 군산 지회에서 첫 발을 뗐다고 한다.
혜진 씨는 올해 3월에 입사한 신참이다. 이들 두 사람은 농아인 통역사다.
반면 향숙 씨와 진아 씨는 건청인 통역사다. 청각이 건강한, 그러니까 듣고 말하는 게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향숙 씨는 대학시절 젊은 농아인 남녀가 부지런히 수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저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무슨 생각을 할까, 과연 의사소통은 될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 수화를 배우게 됐다고 한다.
진아 씨는 친구가 수화를 배운다고 해 “그 어려운 걸 왜 배워?” 하면서도 따라나섰는데, 정작 친구는 중간에 다른 직장을 얻어 가버리고 본인만 중급반, 고급반을 거쳐 통역사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단다.
진아 씨는 서울에서 은행도 다니고 상장회사도 다녀봤지만 지금의 직업이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강조한다. 장애인을 돕는 보람도 큰데다 무엇보다 통역사들 간의 유대감이 높은 점을 이유로 꼽는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군고구마가 간식으로 나왔는데, 주로 진아 씨가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느라 고구마에 손을 못 대고 있자 지회장 은경 씨가 껍질을 벗겨 진아 씨 앞에 슬그머니 놔준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그러니 분위기가 안 좋을 수 없다.
수화 통역의 본분을 넘어 콘서트 출연이라는 엔터테이너 영역에까지 진출한 이유를 묻자, 2017년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은경 씨의 지회장 취임식이 계기였다는 답이 돌아온다. 초대한 손님들을 위해 뭔가 성의를 보이자고 벌인 인인데,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웠다. 그 후 부안종합복지관을 비롯해 외부기관에서 자꾸만 공연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미녀 4총사라는 별명까지 붙었단다. 먼저 청해 무대에 설 일은 아니지만 들어오는 의뢰를 거절하지는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적은 액수지만 공연 수입이 생길 때도 있어 센터 운영에 보태고 있다고 한다.

후견인이자 해결사에 심부름꾼까지

현재 부안지회에 가입된 농아인은 54명이다. 이들에게 수화통역사는 단순한 언어전달자가 아니다. 후견인이자 해결사에 심부름꾼 역할까지 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농아인들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거나 군청에 가서 등본을 떼거나 우체국에서 택배를 보낼 때 소통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처에 나가있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할 때조차 그들은 통역사들의 입과 귀와 손짓이 절실하다. 말하자면 통역사들은 농아인들이 소통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 만능해결사인 셈이다.
그러자니 농아인의 가족들은 제 부모에게 전화를 하는 게 아니라 통역사들에게 연락을 해 “우리 엄마 어떻게 지내세요?” 안부를 묻고, 농아인들도 자식들 전화번호만 던져주고는 알아서 전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단다. 이쯤 되면 거의 개인비서 수준이다.
더러 곤란할 때도 없지는 않다. 한번은 남자 농아인이 비뇨기과에 갈 때 통역을 맡은 적이 있는데, 진료를 위해 속옷을 벗어야 하는데도 한사코 거부해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농아인이 화상전화를 걸어와 빨리 와 달라고 재촉을 해 주말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부랴부랴 나간 적도 있다. 진아 씨의 얘기다. 당시 그 농아인은 경찰이나 119대원의 권유에도 꼼짝 않고 쓰러져 있다가 진아 씨가 도착한 다음에야 앰뷸런스에 올랐다고 한다.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었다. 이밖에도 한 농부의 고장 난 농기계를 고치기 위해 수리업체 직원에게 기계 상태를 부지런히 설명한 적도 있고, 탁구대회에 출전한 농아인 선수를 따라가 코치나 심판 사이에서 통역을 한 적도 있다.
속상할 때도 있다. 농아인이 집을 매매하면서 사기를 당하거나, 다단계 판매조직에 연루돼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것을 볼 때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통역사는 원칙적으로 소통을 도울 뿐 중립을 지켜야 한다. 자기결정권은 결국 농아인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딜레마다. 그렇더라도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비판을 각오하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부안은 특히 농아인이 통역사를 많이 의지하고 서로 연대감도 높다고 한다.
이처럼 일상 통역에 해결사 역할도 해야지, 기사가 따로 없으니 변산까지 차량도 운행해야지, 지회 업무도 봐야지, 각종 행사도 치러야지, 그러고 나면 퇴근 무렵에는 기진맥진하는 경우가 많다. 빠듯한 급여에 처우도 열악하지만 그래도 농아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보람으로 이겨낸다. 이런 와중에도 은경 씨, 향숙 씨, 진아 씨, 세 사람은 현재 사회복지 전공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올 가을이 마지막 학기로 내년 2월에 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자갈 밟는 소리를 수화로 해 봐”

그나저나 수화로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진아 씨는 100%는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지만, 은경 씨는 가능하다고 한다. 은경 씨와 같은 농아인에게는 수화가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는 외국어와 같아서 문법이나 맞춤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농아인을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농아인이 통역사에게 자갈 밟는 소리를 표현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통역사가 난감해하자 농아인이 “왜 못하느냐, 넌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채근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의성어 의태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는 ‘함께 가는 세상’이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혜진 씨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일테면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수시로 들여다봐야 하고, 아이를 키울 때도 불편한 건 없는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밤에는 아이와 자신의 손목에 줄을 감고 자다가 아이가 보채면서 줄이 당겨지면 깨어나 아이를 돌봤다고 전한다.
농아인과 비장애인의 소통 과정에서는 건청인 통역사가 주로 나서지만, 수화를 하지 못하는 농아인들과 소통을 할 때는 은경 씨나 혜진 씨 같은 농아인 통역사가 한 번 더 통역을 해야 한다. 일종의 중계통역이다. 이심전심이라고, 농아인만이 처하는 상황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을 눈빛과 몸짓만으로 이해해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올해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8차 세계농아인연맹(WFD) 총회에 참석한 김은경 씨와 심진아 씨. 총회에는 모두 3500명이 참가했으며, 4년 후인 2023년에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열린다.

농아인도 정상인, 다만 표현하지 못할 뿐

현재 부안에는 청각장애인이 700여명 가량 된다고 한다. 수화를 사용하는 2급 이상은 150여 명으로 거의 선천성 농아인이고, 나머지는 3급 이하 7급까지 노인성 난청을 포함해 어느 정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1급은 청각장애에 다른 장애까지 겹친 사람만 해당된다. 부안은 농아인들의 연령대도 높아 60대 이상이 75% 이상을 차지하고, 선천성인 2급도 60대 이상 비율이 66%나 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수의 선천성 농아인들이 아직 회원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회원이 되면 지회에서 운영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하는 등 혜택이 많은데도, 마치 무슨 유령단체라도 되는 양 의심을 하며 가입을 꺼린다는 것이다. 특히 대처에 있는 자식들이 “우리 엄마는 글씨도 모르고 버스도 못 탄다. 집에만 있는 걸 좋아한다”면서 거절한다고 한다. 지회 쪽에서 “차량도 운행하고 모든 프로그램이 무료”라고 권유해도 막무가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안군지회는 한글 및 수어교육과 같은 문맹교육을 비롯해 생활도자기, 가죽공예, 뜨개질, 한지공예 등 취미·문화 사업도 현재 진행하고 있거나 과거 운영했었다. 농아인의 날에는 여행도 간다. 올 해는 경복궁과 청와대 구경을 다녀왔다. 체육대회도 해마다 열린다. 작년에는 부안군이 주최를 해 14개 시군 농아인협회 회원과 임원, 가족 등 1500명이나 모여 각종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여름에는 바다와 계곡을 번갈아 가면서 수련대회도 한다. 올해는 완주 동상계곡을 다녀왔다.
이처럼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농아인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이장회의에서 참석해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는데 큰 성과가 없었다. 농아인들은 군청이나 면사무소 공무원들과 상담을 할 때 훨씬 신뢰감을 갖는다고 하니, 행정이 나서서 소외된 농아인들을 발굴하고 회원으로 가입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래서 사뭇 타당해 보인다.
지회장인 은경 씨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차원에서 농아인들이 제약 받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한다. 또 농아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시각에 대한 조언도 덧붙인다. “농아인들의 수준이 낮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네,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농아인들도 생활력 강하고 판단하는 능력도 충분하다. 다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점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불현듯 은경 씨의 손짓이 나비의 날개짓을 닮아 보인다. 그 손짓이 그녀의 소망을 이루는 나비효과로 돌아올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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