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을 바라보는 김성순 지배인 ⓒ장정숙

“연중 무휴…전천후 서비스 가족 경영”

영양 바지락 ‘햇섭’ 인증 눈앞에

불경기, 불경기 하지만 I M F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고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우성인데 크든 작든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더 말 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다는 딱한 이야기들이다. 어느 한쪽 햇볕 드는 곳은 없을까. 출출 하기도 해서 오랜만에 부안에서 격포 거의 다 가서 오른 쪽 고사포 해양수련원 옆에 있는 ‘명인 바지락 죽집’을 찾았다. 태풍이 스치고 지나간 월요일 아침 9시 반.
- 월요일도 장사 합니까
“그럼요.”
- 아침 요기나 할까 해서요. 오늘 같은 날도 손님이 옵니까.
“오시지요. 혹 밖에서 보기에는 손님이 많나 적냐에 신경을 쓰는지 몰라도 손님 입은 각기 하나 뿐이지요. 단체 손님만 받는 그런 곳이 아니니까.”

바지락 죽 30년의 주방장

- 여기서 일하신지 몇 년이나 됩니까?
“여기 고사포에서 한 건 한 5년 되지요. 2015년 5월에 오랜만에 자기 소유 3층 건물을 새로 짓고 간판도 ‘명인 바지락 죽’이라고 멀리 국도 변에서도 보이도록 큼지막하게  달았지요. 그 전에는 해창 다리가 있는 변산면 묵정마을에서 남의 집 세를 얻어서 했고.”
- 그 전에도 어디에선가 했다던가.
“처음 시작한 곳이 묵정리예요. 1990년 언니(김순녀 현재 69세)가 창업을 하셨어요. 30년이 다 되네요.”
- 지금 어떤 책임을 맡고 계시는지?
“그냥 일하지요. 지배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주방에서 살아요. 주방장이지요.”
- 일하시는 분들은 몇 분이나 됩니까.
“한 열분 되지요, 다 식구들이에요.”

식구들끼리 먹고 자고 손님 대접하고

종업원이고 사장이고 할 것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식구들’이란 말에 귀가 번쩍 티였다. 흔히 말하는 공동체인가. 족벌회사란 말인가, 나이나 직책으로는 내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김성순이 맨 위다. 59년생, 환갑 진갑 다 지났다. 그런데도 얼굴이 아주 곱고 일하는 사람 손 같지 않다. 허리도 꼿꼿하고 말씨도 아주 또렷하다.
- 어떻게 그렇게 곱습니까.                   
“원 별말씀을. 저희 어머님이 고우시다고들 하셨어요. 부모님 덕이지요. 우리 형제들도 다 곱다는 말을 들었어요.”
- 그래 식구들이 운영한다고 하시는데 누구누구입니까.
“제 언니와 저, 동생들 저희 세 자매와 올케, 조카 그리고 오빠도 저희 일을 거들어 주시고. 그밖에 같이 일하시는 분들도 거의 같이 먹고 같이 자요.”
- 어디서요?
“여기 ‘명인 바지락’ 죽집 3층이 숙소입니다.”
부안군 변산면 변산 해변로 794(구주소로는 변산면 운산리 446-8)가 영업장 주소다. 세 자매 숙소와 오빠 올케가 사는 숙소, 그리고 다른 식구(실상은 남)가 사는 숙소 동이 나란히 있다고 한다. 먹는 것은 식당에 내려와 같이 하게 되니 ‘어엿한 식구’라고. 식구 구성은 좀 다르지만 30년 전 창업 때부터 이렇게 운영해왔다고 한다. 규모가 크든 작든 업종 따라 영업 방식이 다른 법. 식당 영업은 음식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설거지나 뒤처리를 하는데도 손발을 써야 한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씨에는 손님은 뜸한데 일거리는 더하다.

주방에서 채를 써는 김성순 씨

진짜 연중 무휴, 추석 설날 없다

연중무휴라니! 하루 쉬느냐 이틀 쉬느냐가 다를 뿐 1년 365일이 됐든 366일이 됐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니 처음 듣는 업소다.
‘명인 바지락’이라는 상호 하나로 특화했듯이 진짜 ‘연중무휴’를 특허 낼만도 하다. 명인이라는 말이나 바지락이라는 말은 보통명사다. 그렇지만 이 두 낱말이 합쳐져 상호로 쓰여지면 고유명사로 되는 이치를 이 ‘명인 바지락’은 절묘하게 발명해 냈다.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다 보니 이 명인 죽집의 영업방식을 듣다가 뜬금없이 침대 광고 생각이 났다. “침대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바지락 죽 집이 아닙니다. 명인바지락입니다.”
- 영업은 몇 시 부터 몇 시 까지 합니까.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아침 아홉시 반에 열고 여섯시 사십분에 닫지요. 하지만 저희 일하는 사람들은 영업시간 한두 시간 전부터 서성대고 문 닫고 나서도 한두 시간은 ‘뒷마무리’를 합니다. 직책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 10시간, 12시간 일하지요. 저나 올케는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죽 끓이는 육수 준비하고 반찬 준비하지요.”
- 그렇게 오래요? 그럼 8시간 노동이다, 주 40시간이다 하는 건 날라 갔겠네요.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 한분 한분을 귀중하게 모셔 그분들 입맛에 맞게 음식을 차리고 우리 식구들끼리는 몸이 성할 때까지는 열심이 일하자, 이런 마음이지요.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다 ‘경력자’들이어서 보수가 다른 곳 보다 조금 많아야지요. 일도 잘하고 영업도 잘 해야지요.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살림을 잘 해야지요. 한 20년, 30년 하다 보니 조금 알 거 같데요.”
이쪽 변산 바닷가에는 바지락 죽 집이 40-50집이 있지만 바지락 죽하나만 파는 단일품목의 전문점은 여기 고사포의 ‘명인 바지락’ 외에 해창 안쪽 묵정리의 ‘원조 바지락’과 ‘온천산장 바지락’ 세 곳 뿐이라고 한다. 그만큼 단일 업종으로 승부를 겨루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 어떻게 그렇게 오래 견디었다고 보시는지.
“이쪽에서는 우리 ‘명인 바지락’이 바지락죽의 개척자인 걸 다 알아요. 변산반도가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할 때 군청에서 이쪽 부안 변산 바닷가만의 독특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심했대요. 그 전엔 백합죽이 대표음식 이었는데 종패를 잘못 집어넣어 폐사 소동이 나고 양식업자는 물론 백합죽 식당까지 엄청난 손해가 났대요. 그때가 1990년대 초. 마침 저보다 두 살 위인 언니 김순녀가 이 바지락 죽에 착안해서 처음 해창 안동네 묵정이라는 마을에서 남의 셋집을 얻어 시작 했어요. 저는 얼마 뒤에 언니 일을 거들었고. 이 무렵에 몇 분들이 어깨 너머로 바지락 죽의 ‘노하우’를 배웠대요. 어떻든 김순녀는 바지락죽의 개척자지요.”                              
- 김성순 씨는 계승자고?              
“저만 계승자겠어요? 우리 식구 전부가 계승자라면 계승자인 셈이지요.
말로만 명인이 아니라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 같은 공인 기관에서 주는 간 맞추는 식품명인은 없는가.
- 명인 바지락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습니다. 육수로 우려내요.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하시던 식으로 말입니다. 음식은 손맛이라고 하지 않아요. 흔히 간을 맞춘다고 하지 않습니까. 철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듯이 철따라 바지락 국물 재료가 달라져야지요. 재료도 좀 멀고 비싸더라도 현지에 가서 사 와요. 바지락은 여기서 가까운 성천이나 위도, 고창 심원까지 가서 사옵니다. 정기적으로 납품받지요. 쌀 고추 야채 같은 건 전주 농협공판장에서 사오고.”
여기 부안도 좋지만 품목이나 품질이 다양해서 고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
- 일 하시면서 어려운 일은?
“첫째가 인력 난이예요.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배워서 일 하려고들 하지 않아요. 경력자는 구하기 어렵고. 또 하나는 바지락이라는 것은 철에 따라 그 애들 생리가 다르지 않습니까. 해감 시키는 게 무척 어려워요. 같은 조개류지만 백합은 지금거리지 않는데 바지락은 조금 지금거리거든요. 많은 손님들이 우리 ‘명인 죽집’을 찾는데 ‘여기 바지락 어디서 사 왔느냐’, ‘왜 여기 것은 지금거리지 않느냐’고 물어요. 뭐라고 말하겠어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틈에. 그저 고맙다고 말할 뿐이지요.”         

한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일하는 ‘주식상’ 공동체의 얼굴, 왼쪽에서 두 번째가 올케 양여사

가업

바지락죽은 김순녀-김성순-양정애 일가의 ‘가업’이 되고 있다. 가업으로 된 연유가 궁금했다.               
김순녀의 오빠는 전에 부안군 의회 의장과 전북 도의원을 지낸 김선곤이다. 김 씨 일가족은 변산면 지서리(지동리)에서 나고 컸다. 김선곤이 부안중학교 2학년 때인 1964년 황달이 걸렸다. 영양부족이나 과로로 얼굴이 까맣고 눈이 노래지는 그런 병이었다. 놓아두면 더러 낫기도 하고 명 짧으면 죽는 그런 병이었다. 낫겠거니 했지만 열흘을 결석해도 병은 낫지 않았다. 어머니는 성천과 해창을 번갈아 발품을 팔았다. 바지락을 구하러 다녔다. 며칠 동안 죽을 약으로 믿고 먹이었더니 금방 나았다. 어머니는 ‘죽 아짐’으로 통할 정도였다. 훨씬 뒤에야 안일이지만 이쪽에서는 노인이나 산모에게 흔히 먹이던 영양식이었다.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이 되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릴 무렵 청년 김선곤은 신형구 한식 등이 활동한 ‘부안발전협의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여동생에게 “자네 죽집 한번 해 볼랑가.”하며 권한 사람이 바로 오빠였다고 한다.                       
69세의 할머니는 나이를 잊고 산다. 바지락 죽으로 변산의 바다와 산을 찾는 전국 팔도의 손님들의 입맛을 돋우는 일에 폭 빠졌다. 1층과 2층 합쳐 400석의 객석을 갖춘 보기 드문 대형 죽집이다. 하루 많을 때는 1,600명, 1,700명의 손님이 몰려든다. 적을 때도 200명이다. 일찍이 없던 불경기인데도 ‘명인 바지락’은 웅비의 설계에 바쁘다. 국비와 자부담 3억으로 환자에게 유익한 ‘균형 영양 바지락’ 시설을 만들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특허기술 이전을 받아 상품화단계에 있으며 가공공장의 ‘해썹’ 인증을 기다리고 있다.
명인에게 무슨 학력이 필요 하겠는가. 양념으로 몇자 적는다. 변산초등, 변산서중을 나와 고등학교는 서울수도여고를 나왔다. 4-5년 동안 통신공사 공무원으로 일하다 올케와 언니가 일하는 ‘바지락 죽집’의 안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두 자매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아들 딸들에 용돈 의지하거나, 요양원에 들어가 밥 안 해 먹고 설거지 안 해서 편하다지만 외로운 사람들 심난한 얼굴만 쳐다보는 그런 생활과는 전혀 다른 ‘노인 새로 살기’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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