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앞둔 홍화백의 홍안 백발, 서울 인사동 전시장에서 ⓒ장정숙

“선천성 심장병 앓으며 화력 30년”

날개 돋힌 선경- 서울로, 영월로

십승지 부안몽유도

지난 10월 2일부터 7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복판 ‘서울 아트갤러리’ 5층과 6층에서 ‘십승지 몽유부안도’라는 이름으로 오산 홍성모 화백의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된 작품 수는 88점, 전부 산수화다. 거기에다 그 대상은 부안과 변산 만으로 꽉 채웠다. 흔하지 않은 야심작이다.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은 거의 서울 사람들로 보였다. 여럿이 아니라 한둘이 고작이었다. 이들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된 동선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더러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댈 듯이 하다가 천천히 뒤로 멀찌감치 물러서기도 했다. 서로 말하는 이가 드물었다. 일행인 듯 한 옆 사람에게 이 그림 어떠냐는 식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는다. 수십 개의 화랑에서 열리는 인사동에서 수 백, 수천 명이 우굴 거리며 일어나는 광경치고는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더구나 이 전시장이 몇몇 거장들에게만 허용된 전시장이 아니오, 관객 또한 내로라하는 미술 애호가들만의 자리가 아닐 텐데 이런 보통의 전시장에서 이런 조용하고 다소곳한 정경이 벌어지다니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시장은 그림을 감상하는 자리다. 작가는 자기의 예술혼과 기량을 애호가들에게 선보이며 그 그림을 그 자리에서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값으로 파는 일종의 약식 경매장 구실도 한다. 그런데 이 전시회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림을 상품화하려면 코드로 특정되어야 하고 가격이 정해져야 한다. 작품 번호, 작품 이름과 규격, 거기에다 가격은 상품화의 필수 요건이다. 가격은 이 전시회를 주관하는 매니저와 손님 사이에 즉석에서 정해진다.

군청에 걸린 57미터의 대작

- 그림 팔지는 않습니까?
“팔기도 하지요. 아직 준비가 덜 돼서요. 손님이 찾으면 적당한 값에 드리지요”
- 전에도 전시회를 여러 번 하셨다는데 그때도 이런 식으로 했습니까?
“그 때  그 때 형편대로 하지요”
- 부안군청 1층 현관홀에는 엄청나게 큰 그림이 한 면 벽 수십 미터를 덮고 있던데 그런 큰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되고 이거 여쭙기 좀 뭐 합니다만 얼마쯤 받은 겁니까, 거저 기부한 겁니까?
“군청 현관에 걸려있는 그림이 ‘해원부안 사계도’지요. 처음부터 아주 휑한 현관 벽에 걸려고 거기에 맞추어 그린 그림입니다. 길이가 57미터가 넘습니다. 96*5740 이지요. 작년 7월 1일 걸었습니다. 물어 보시니까 이야기 하는데 더러 많은 그림을 크고 작고 간에 전국의 여러 곳에 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만 처음 발을 붙인 곳이 부안이 아니라 영월이었어요. 벌써 20여 년 전에 영월예술회관에 ‘선동십승지’라는 큰 작품(433*220)을 걸었어요. 작년 부안군청 현관홀에 ‘해원 부안사계도’라는 대작을 건 같은 날에 영월군청 현관홀에 걸었습니다. 내 고향 부안 변산과 내가 좋아하는 영월 선돌이 있는 지역의 군청에 제 그림을 걸게 되니 저로서는 영광이지요. 더구나 한반도 동북쪽의 영월과 서남쪽의 부안이 천리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 좋은 산수에 폭 빠진 홍 아무개가 양쪽 군수(영월 최명서, 부안 권익현)의 새 임기가 시작되는 작년 7월 1일 현판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원부안사계도 일부

- 이런 큰 작품을 그리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어디서 작업했습니까?
“3년 전엔가 곰소에 있는 젓갈 센타 한쪽 20여 평을 쓰도록 군수가 주선해 주셨어요. 누가 군수가 되든 임기가 시작 되는 날 그림을 걸자고 말입니다.”
군청 청사는 김호수 군수 때 지었다. 그림 그리는 편의는 김종규 군수 때 받았다. 정작 현판 테이프는 권익현 군수가 끊었다.

선천성 심장병을 달고 다니며

오산(悟山) 홍성모 화백은 1961년 부안군 백산면 신평리 귀야리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산중학교와 백산고등학교를 나와 원광대학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와 동국대학 대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논 한 필지 1,200평의 농사로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그 근처에서는 알아주는 쟁기질 꾼이었다. 쟁기질 꾼은 보통 품삯의 배를 받았다. 어머니도 채소 가꾸는 솜씨가 대단하여 무든 배추든 갓이든 남보다 잘 지었고 값도 더 받았다. 소년 홍성모는 가난한 부모가 자식 하나 가르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두 눈으로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공부는 신통치 않았고 그렇다고 몸이 틀스럽지도 않았다.
- 어떻게요?
“어려서부터 숨이 차요. 입술이 파랗고…… 뜀박질도 꼴찌에요. 거기다 공부도 신통치 않고,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천성 심장병이래요.”
-그래 치료는…
“병을 안고 같이 가는 거지요. 금방 죽는 병은 아니라니까. 그런데 정말 혼이 난 건 만성 췌장염을 앓았어요.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고 4년 동안이나 고생했어요. 그때마다 중앙대 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해서 치료 했습니다. 이 거 그림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      
- 그거 아니래도 예술의 길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건 언제 알게 되었습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여자 분이었어요. 엄기봉 선생이라고. 그림 숙제를 내주셨는데 저는 그때 할아버지 묘소를 그린다고 되나 캐나 그렸어요. 야산에 있는 묘이니 온통 빨간 황토 흙이지요. 그래 크레용으로 빨갛게 칠했지요. 선성님께서 제 그림을 특별히 아이들에게 내보이며 ‘정말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다른 애들 보다 건강하지 않으니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렴’ 하시는 겁니다.”
가도 가도 황토길…… 한하운의 시가 아니더라도 전봉준의 황토현 전투가 아니더라도 산이고 묘똥이고 밭이고 할 것 없이 온통 벌건 황토 땅인 것을 열 살 소년은 일찍이 고부천, 가야산에서 발견했다. 정작 이 소년이 동쪽 육십 리 밖에서 바라만 보던 변산 품안에 안겨 이 골짜기 저 봉우리를 더듬을 때 “아, 금강산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산에 가면 산의 황홀함에 병을 잊었다. 그는 자기 다리와 자기 숨으로 산이 들어오기를 허용 하는데 따라 산의 살속으로 핏속으로 뼛속까지 더듬었다.  변산의 영기(靈氣)를 흠뻑 들이마시고 내 쉬는 가운데 변산과 화가는 한 몸이 되었다.

화가의 탯줄을 묻은 백산 구야리 정경 그림

 

청림의 겨울 이야기

심장병 어린이 돕기 나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이라더니 홍화백은 자기가 이런 저런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서울 중앙대 병원, 익산 원광대 병원, 인천 길병원 등의 도움으로 심장병어린이 돕기 운동에 나선다. 1986년부터 온 나라가 IMF의 금융위기를 겪던 97~ 98년까지 13년 동안이었다고 한다. 그가 도울 수 있는 길은 이들 환자들을 위해 적은 돈이나마 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그림을 대학이나 대학병원에 기부하고 대신 받을 만 한 돈을 받아 그쪽에 보냈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의 법명이자 아호는 오산(悟山), 깨달을 오, 뫼 산 자다. 그림의 소재 또한 거의 변산 이었다. 돈을 받고 안 받고는 관계없이 그는 산과 고향의 분신이었다. 재벌이거나 큰 중앙관청에서 그의 그림을 보기는 어렵다. 그는 장사에는 등신이었고 돈에는 무능했던 듯하다.
- 그래 어떻게 먹고 살았습니까.
“허허, 밥 먹고 살았지요. 평생 달고 다닌 ‘선천성 심장병’을 지금도 동무 삼고 있고 다들 죽는다는 ‘만성 췌장염’을 치료 했고 이렇게 인사동 한복판에서 전시회도 하지 않습니까?”         
- 그래도 큰 작품 하나 하려면 몇 달 이나 몇 년이 걸리기도 하고 그 재료비나 표구대만 해도 수월치 않을 텐데…… 혹 그만 두겠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한 적은 없었는지?
“제가 선택한 직업인데. 나와 인연 있는 돌멩이 하나 풀뿌리 하나도 귀한데 하물며 일이 되고 안 되고 거기 매달려서야 되겠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몇 년 전에 부모님이 사시고 제가 난 백산 신평 구야리 집터에 조그만 화실 하나 만들까 생각 했어요. 한 200평 되는데 집을 짓기로 하면 농가 집과는 달리 꽤 넓은 작업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 포기하고 그 집터를 팔았어요. 꽤 받았지요. 그런데 그 돈은 작품재료비다 표구 값으로 솔솔 빠져 나가고 말데요.
1993년 이후 전국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해외 전시도 몇 번 했다. ‘이당 미술상’과 ‘한국 전문인 대상’을 받았다.

같은 겔러리에서 부부전을 연 수채화가인 부인 강지우 화백

부인 강지우는 같은 원광대 미대 동문이자 현역 수채화가다. 이번 전시회의 압권이라 할 십승지 몽유부안도(十勝地 夢遊扶安圖) 등을 그리는 2년 몇 달 동안 그는 동가숙 서가식 이었다. 작업은 앞서 말한 곰소의 수협 젓갈센터 한쪽을 빌려 쓰고 잠은 유정자에 있는 개암 죽염 힐링센터에서 자고 밥은 사먹었다. 서울 집에서 작업하는 부인이 가끔 내려와 ‘만나는 집’을 보안면 신복리에 월세 5만원으로 얻어 썼다.
홍화백은 오는 11월부터 초라하고 불편한 세집 살림을 훌훌 털고 강원도 영월로 떠난다. 영월군이 제공하는 100여 평의 숙소 겸 작업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섭섭한 생각이 든다. 부안에도 영월 못지않은 문화 예술시설들이 많은데 부안 땅은 그토록 끔찍하게 부안과 변산에 폭 빠진 보기 드문 화가 한 사람을 잃은 것인가, 빼앗긴 것인가.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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