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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사람 33>한살림 생산자연합회장 이백연(李白淵)
이백연 회장. 투박한 농투성이 손으로 그토록 차분한 글씨가 나올까 ⓒ장정숙

유기농 1세대, 손으로 지켜낸 밥상

서울에선 '한살림' 알아주어

원 도청 토박이

이백연 회장은 친환경 농업 개척세대, 1세대다. 전국의 친환경농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한살림 생산자 연합회’ 회장이자 ‘한살림 산들바다 유기농업 영농조합법인’의 회장이다. 1957년 8월1일 생. 우리 나이로 63세, 다부진 몸매 탓인지 한 10년은 젊어 보인다. 변산면 도유로 63변지, 구 주소로는 변산면 도청리 853번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이 집터에서 났다고 한다. 물려받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달리 뚫고 나갈 길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척박한 산 밭뙈기 몇 백 평에 의지하고 살았다. 거의 어머니 일거리였다. 아버지는 가끔 행상을 나가기도 하고 동네 구멍가게를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도 재산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는 두말 할 것 없이 박탈되었다. 금수저다 흙수저다 하는 건 요즈음 서울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1970년 격포초등학교를 나오자 학교고 직장이고 아무데고 갈 데가 없었다. 대를 이어 도청리 촌구석에 쳐박혀 있던 그가 무슨 재주로 이런 어마어마한 책임을 맡게 됐을까.
처음 사람을 만나고 뻔히 알만한 이름 석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일 때가 있다. 엉뚱하게 이름을 물어 본다. ‘이배견’ 회장이라 부릅니까, ‘이뱅연’ 회장이라 부릅니까 하고. 그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쪽에서는 ‘뱅연이’ ‘뱅연이 회장’이라고 부르지요.      

3대가 나고 산 변산면 원도청 집(도유로 63번지). 10여 년 전 20여 평의 벽돌집으로 새로 지었다.

- 어떤 연유로 농민운동이랄까 친환경운동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이야기 하자면 길어져요.”
-간단히 말하자면....
“훌륭한 분들을 우리 동네 도청리나 우리 면 변산에서 뵙게 됐어요.”
-어떤 분들이지요?
“80년대 초던가, 저 산 넘어 ‘띄목’(모항)에 살던 박배진 씨가 우리 동네에 자주 오셨어요. 뒤에 소값 폭락에 항의하여 소떼를 몰고 서울까지 올라가 전국에 유명했던 소몰이 투쟁을 할 때지요. 우리 동네에서 여기 참여한 청년들이 많아요. 대학교수를 내던지고 변산에 오셔서 변산공동체를 만든 윤구병 선생님도 그 무렵 찾아가서 뵈었어요. 그리고 거 누구더라 아, 오 건 선생과 사모님 이준희 할머니, 이런 분들 하시는걸 보고 저는 정말 감격했어요. 이보다 훨씬 먼저 부안농고(지금 부안제일고) 선생님을 하시다 저 넘어 소격의 야산 수 만평을 혼자 일구어 지금 조각공원의 토대를 만든 김오성 선생의 아버지도 부러 가서 뵈었어요.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시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 가지신 분들이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시려고 이 구석까지 오신 것도 대단한 일인데 이분들 사시는 걸 보니까 저희들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어렵게 지내요. 아주 우리와 똑 같이 먹고 자고 한단 말입니다. 지금 누가 이렇게 삽니까. 절에서 이렇게 삽니까, 교회나 성당에서 이렇게 삽니까. 정치하는 사람들, 농민을 위한다는 농협 수협 축협 같은 협동조합 하는 사람들 이렇게 삽니까.“
차분하게 이야기 하는데도 초창기의 감격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농사 짓는 데는 그분들 보다 회장님이 박사일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분들 사는 자세가 저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인물이다 지도자다 하는 사람과는 전혀 달랐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도청에 사는 이웃집 사람이 작두질하다 잘못해서 왼손 손가락 하나를 싹둑 자르고 말았어요. 그 옆에 있던 오 건 씨가 땅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을 주어다 부쳐주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어 우선 응급처치를 했어요.”
-농민 운동한다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어떻게 의사가 하는 일까지……  
“오 선생님이 군대 3년 할 때 의무병으로 있었대요. 농기구야 여기 것 사서 쓰면 되는데 이런 의료기구 일체를 가지고 내려 오셨어요. 사람들은 그저 놀랐지요. 빨리 읍내 병원에 가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루 서너 번씩 오는 버스를 언제 타며 그걸 타고 읍내 병원에 간들 병원 문이 24시간 열려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급할 때 물 한 모금 목에 넣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도청 마을에 오셨단 말입니다.”

1톤 타이탄과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 그리고 허리에 찬 핸드폰주머니가 이회장의 주장비다. ⓒ장정숙

매출 22억의 ‘산들바다영농조합법인’

이 유기농 조합법인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 영농조합법인이다. 일반 농사에 비해 생산성은 낮고 그렇다고 가격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도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직거래하는 기구를 서울은 물론 전국 주요 도시에 두게 된다.
-지난해 매출은 얼마나 됐습니까.
“농산물이 15억, 가공식품이 7억 해서 22억 이었어요. 100% 친환경이지요”   
-얼마 되지 않네요.
“그래도 대견해요. 우리가 친환경농업을 하는 건 그저 수익을 얻자는데만 있지 않습니다. 곡식의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의 밥상을 살리며 이 땅의 농민 농업을 살리자는 거지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지고 잇속 밖에 없어요. 흔히 환경파괴다 뭐다 하지만 누가 왜 파괴하는 겁니까. 핵발전이다, 중화학 공업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크든 작든 환경을 파괴하는 큰 요인이 되지요. 농업과 어업 축산업 같은 1차 산업의 경우도 정도의 차는 있지만 환경파괴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고 있어요. 화학비료, 제초제, 방부제, 어느 새 우리 농민들도 여기 거의 중독돼 있어요. 풀과 벌레가 죽어 가는데, 땅이 죽어 가는데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을 먹는 사람의 창자가 온전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조합법인은 어떻게 만듭니까.
“5가구 이상이면 조합을 만들 수 있어요. 부안에는 이런 조합이 22개 있지요. 정읍은 17개, 군산은 15개, 남원이 20개, 진안이 10개던가……”
-도정공장도 따로 있습니까.
“그럼요. 다른 쌀이 친환경 쌀로 둔갑하면 안 되니까. 주로 친환경 쌀을 많이 생산하는 곳에 두게 되지요.
-어데 어데지요?
“부안은 여기 마포에 있고 충남의 아산과 홍천, 충북의 괴산에 있습니다. 올해는 하나 더 늘려 경남 산청에도 도정공장을 지었습니다.”
필자가 이 친환경의 현황에 대해 아주 캄캄한 것을 탓하지 않고 마치 쥐어주듯이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얼마 전 서울 문래동 ‘한 살림’에 나갔더니 생산지가 부안으로 된 채소액이 있어 몇 봉지 사다 이웃에 추석 선물로 주었더니 고향이 부안이냐며 새삼 좋아하더래요.
“채소액은 부안의 ‘산들바다’와 공주의 ‘하늘 빛’ 두 군데서만 나오고 있지요.”
“팔 곳이 없으면 만들지도 말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공동체 사람들은 무엇을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지를 도시의 소비자들과 하나하나 검토한다. 그런 다음 아주 자세하게 출하 계약을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출하 날짜를 지키는 것이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것이 농업이다.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출하 날짜를 좌우한다. 기상은 논두렁 하나 밭고랑 하나 두고서도 다를 수 있다. 친환경 농사하는 농민들이 하늘을 의지하고 하늘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모 곁에 올망 졸망 모인 3남매

서울에서 날라온 천사 정복자

어찌어찌 하다 어느 결에 서른을 훌쩍 넘긴 노총각은 어디 짝을 구한다는 명함도 내놓지 못하게 됐다. 동생들은 줄줄이 앞차가 비켜주기를 바랐다. 부모님인들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서울의 어느 봉제공장에 취직된 마을 아가씨, ‘오빠 오빠’하며 따르던 서울 간 ‘이인옥’이라는 아가씨에게서 어쩌구 저쩌구 긴 편지가 왔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대빵인데 오빠 이야기를 했더니 솔깃해 하더라고.      
이들은 죽자 사자 한 달에도 몇 차례씩 편지를 나누었다. 자기를 짝지어 주려고 같이 내려와 채석강이며 내소사, 고사포 초가집까지 구경시켜 주었다. 곡성아가씨는 풍광에 홀렸는지 눈앞의 열 살 위 총각도 좋게만 보였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꼬셨기에 서울 아가씨가 이 촌구석까지 왔을까……
“꼬신다고 자기 귀한 몸을 아무에게나 맡기겠어요. 제가 고향을 잘 타고 난 거지요. 부모님한테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걸 배워 몸에 밴 것을 그 사람이 보았겠지요. 다만 제가 집은 가난해도 중학교나 고등학교 정도는 나온 걸로 알았대요.”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천사가 서울에서 내려온 셈이었다. 이 아가씨가 ‘한살림’의 보금자리를 이룬 아내 정복자(鄭福子)다. 아들 딸들은 모두 나가서 제 나름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고.
농사 짓는 땅은 총 6,000평 남짓. 집 가까운 밭에 포기배추를 심었다. 고추와 양파 시금치 단호박 작두콩도 재배하고 있다. 품목이 많으면 일손은 더 가지만 손실의 위험은 그만큼 적어진다. 논 3,000평은 100% 유기농 벼다.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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