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천지인 하루를 살다보면 귀가 먹먹해질 때가 있다. 누구든지 요란한 소리를 내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받아야 존재한다고 여기는 세상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관한 사유는 한 순간 시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태초의 카오스는 혼돈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나름의 법칙과 질서가 있었다. 그 침묵 속에는 영혼의 방황자 횔덜린이 말한 성스러운 황무지가 존재한다. 모든 원초적인 것들보다 앞서 존재하는 침묵은 “아무 것에도 소급시킬 수 없는 원초적 주어져 있음”이다. 침묵은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위대함이 있다. 하면 침묵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소음은 침묵 속에 편재되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침묵은 명명할 수 없는 만 가지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전날 저녁보다 아침이면 더 하늘로 뻗어 있는 나무들 속에, 남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 없는 계절들의 변화 속에, 무언의 조화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속에. 이렇듯 존재와 활동이 하나인 침묵의 모습들에는 이름이 없다. 그럴수록 이 이름 없는 침묵의 대립물로서 말은 더욱 분명해지고 확실해진다. 그러나 침묵과 적대관계 속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말은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말과 침묵의 병존, 서로 대립되는 두 현상이 마치 서로의 일부인 것처럼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어떤 혼돈 속 로고스를 언급한 신적인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항상 제 삼자가 귀 기울이고 있다. 그 제삼자가 바로 침묵이라고 피카르트는 말한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따라서 말은 혼돈의 울림이자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침묵은 말이 없이도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공간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온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침묵은 창조 이전에서 창조로, 무역사성에서 인간 역사로, 나에게서 너로, 그리고 우리로의 귀결을 제시한다.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詩는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침묵 위를 비상하고 침묵을 동경한다.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말들로 대상을 완전히 사로잡지 않는다. 다른 시인도 또한 그 대상에 대해서 한마디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한다. 때문에 그러한 시는 고정되거나 경직되어 있지도 않고 어느 순간에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詩는 말로부터 와서 말들에게로 간다. 인간은 침묵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침묵은 거의 말을 할 수 없다는 무능력, 소극적인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제는 더 이상 침묵과 관계가 없다는 듯이 소음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든다. 인간은 시에게서까지 소음을 느끼려고 한다. 그것으로 소음이 정당화된다고 착각한 채 외부 세계의 소음이 시의 소음에 의해 진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란한 외부 세계의 소음과 나란히 시는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다. 침묵이 사라지고 있다.
피카르트가 언급한대로 침묵은 오늘날 효용의 가치에 부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침묵은 단지 존재할 뿐 어떠한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을, 수익성과 효용성에 따라서 계산되는 현실의 소음을 뒤로 하고, 누구든 맞을 준비가 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로 조용히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