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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민란, 고부봉기, 고부농민봉기, 고부기포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0.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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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 객사[일본강점기] - 현재 고부초등학교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고부의 동학인과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3월 13일에 고부를 떠나 무장(茂長)으로 이동하기까지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민란(民亂)’, ‘봉기(蜂起)’, ‘농민봉기(農民蜂起)’, ‘기포(起包)’ 등 여러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1894년 당시에는 당연하게도 ‘무지몽매한 백성이 일으킨 난’이라 하여 민란으로 규정되었다. 설령 난을 일으킨 이유가 인정되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 했다는 점에 있어서 진압의 대상이었고, 한편으로 이들의 분노를 달랠 필요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원만한 인물을 보내 사태를 수습하는 한편, 다시는 이와 같은 민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차원에서 진상조사와 함께 관련자 처벌에 나섰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역설적으로 봉기의 확대 명분이 되었고, 그것은 이미 조선왕조가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다른 한편, 오늘날 일부 연구자들이 고부에서의 봉기를 민란으로 한정시키려는 주장은 “고부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조병갑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투쟁에 머물렀고, 결과적으로 해산함으로써 실패한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과 구분되는 민란”이라는 데에 있다.
봉기의 사전적 의미는 ‘지배자의 무력이나 가혹한 정치나 압제(壓制)에 대항하여 피지배자인 백성이 벌떼처럼 무리를 지어 세차게 일어남’이다. 이 용어는 근대 시민정신, 즉 인간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근대사회가 열리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부에서의 봉기는 조병갑을 비롯한 지배자의 학정과 수탈이라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일어난 백성의 정당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와 함께 ‘고부봉기’는 한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경제투쟁은 물론 정치투쟁을 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단순한 민란과 차원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나온 용어이다. 따라서 고부봉기는 근대 시민정신을 자각한 고부의 동학인과 농민이 일으킨 저항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부봉기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만석보 주변

‘고부농민봉기’는 앞서 언급한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 농민이라는 점에 비중을 둔 용어이다. 이것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무장으로 이동하기까지 50여 일 동안 고부에서의 움직임은 동학인보다 일반 농민이 주력을 이루었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러나 이 용어는 전봉준을 비롯한 양반 출신의 동학교도였던 지도부가 봉기를 주도하고, 사발통문거사계획에 참여한 20명이 모두 동학교도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으로 동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고부기포’는 동학 주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즉 포접제(包接制)를 근간으로 하는 동학의 조직에서 포가 일어났다는 의미를 갖는 기포는 “고부봉기’의 바탕이 된 사발통문거사계획 참여자 20명 모두 동학교도로 확인되었고, 전봉준이 재판과정에서 ‘기포’라고 부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처럼 1894년 1월 10일 고부 관아 점령부터 같은 해 3월 13일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무장으로 이동하까지 50여 일 동안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여러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1월에 일어난 사건은 하나이지만, 그 당시는 물론 후대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각기 처한 환경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건국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고려왕실을 비롯하여 고려에서 혜택을 받은 이들은 망국(亡國)이라 하여 원통해 하고 슬퍼하겠지만, 조선의 건국에 앞장서거나 지지한 이들은 썩어빠진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고 새 나라 새 왕조를 세워 백성을 구제했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는 것처럼, 역사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은 물론 특정 사건의 이면(裏面)에 감춰져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고부봉기를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탐학, 고부 관아 점령, 신임 군수 부임 후 회유, 이용태의 만행, 해산 후 무장으로 이동 등으로 정리된다. 결과적으로 겉으로만 볼 때에는 고부에서의 봉기는 해산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부에서의 해산과 무장으로의 이동, 그리고 무장포고문이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가 고부를 떠나 무장으로 이동하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무장에서 이른바 포고문을 발표한 뒤에 다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이유, 그리고 주요 지도자들이 비로소 한 자리에 모두 모여 백산대회를 열고 혁명군으로서의 조직을 갖추면서 강령과 군율을 선포한 저간의 계획이 언제 수립되었고, 구체화되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다.    
고부관아 점령 이후 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한 지도부가 마침내 고부에서 무장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한 뒤에 백산에 모여 본격적으로 혁명을 시작하였다는, 일련의 과정을 연속적으로 이해할 때,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한 사건은 민란이나 농민봉기나 기포보다는 봉기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하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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