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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봉기 당시 부안의 움직임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09.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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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지방도」와 고부 백산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을 보면, 사발통문거사계획과 고부봉기, 그리고 무장기포와 백산대회가 단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4단계를 겉으로만 보면, 그 당시 부안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면, 그 당신 백산은 부안 백산이 아니라 고부 백산이었고, 고부봉기 당시 부안 동학인과 농민들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정읍시는 1894년 당시에는 고부군과 태인현, 그리고 정읍현으로 각기 다른 행정구역이었고, 1914년에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영구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통폐합시킨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고창군 역시 무장현과 흥덕현, 그리고 고창현이 1914년에 통폐합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부안군은 1894년 당시 부안현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 당시 일부 구역이 조정되어 부안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백산이다. 고부 백산이 부안 백산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데, 지리적으로 고부읍보다 부안읍이 가깝다는 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서 지역공동체를 해체시키고 분열시킬 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말살시키려는 획책의 하나로 설명하였다.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백산대회를 지우기 위한 포석이라고 정리하였다.   
고부봉기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의 동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당시 부안 동학을 이끌고 있던 대접주 김낙철이 전봉준이나 김개남 등 혁명 주도세력보다는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과 밀접하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즉 고부봉기 이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 김낙철이 동생 김낙봉을 해월에게 보내 뜻을 묻고, 지시에 따른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부봉기가 일어난 1월부터 백산대회가 개최된 3월까지 부안의 동학인과 농민들은 은인자중(隱忍自重)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1894년 2월 19일, 무장 회합을 증언한 「김홍섭 회고」(중앙일보 1965. 11. 5)

고부봉기 당시 부안읍내와 지척지간에 있는 백산에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이 성을 쌓으며 오랜 동안 머물렀지만, 이에 동조하는 부안 동학인의 구체적인 모습이 파악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또한 2월 1일에는 공석이 된 고부군수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안현감이 고부로 갈 정도로 부안의 정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가라앉기는커녕 점차 확대의 조짐을 보이자 2월 27일에 이르러 부안에서도 동학농민군에 맞서려는 수성군(守城軍)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사이 신임 고부군수로 박원명이 부임하고, 안핵사로 이용태가 고부 현지에 도착하면서 폭풍전야(暴風前夜)처럼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소강상태를 보이던 고부봉기가 다시 요동쳤다. 3월 1일, 부안 줄포에 있는 세금 창고(稅庫)를 점령한 뒤 군량(軍糧)을 확보한 동학농민군은 3월 3일에는 소극적으로 가담했던 군중의 귀가를 묵인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영광․순천․진안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이 부안에까지 전해졌고, 3월 10일에는 고부봉기를 이끈 지도부가 사냥꾼에게서 총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무장(武裝)을 시작하였다. 즉 군량미와 총기를 확보하는 등 본격적으로 혁명군의 위상을 갖추는 무장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고부봉기가 확산의 조짐을 보이던 3월 11일경, 약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금구에서 태인을 거쳐 부안(백산)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다. 이때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가 전봉준이라는 말과 손화중이라는 말이 전하는데, 누가 지도자였던 고부봉기가 확산되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이들이 부안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하였음도 분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은 3월 13일에 이르러 적극 참여자 50여 명과 함께 고부를 떠나 무장현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고부봉기에서 실패한 전봉준이 손화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 동참을 이끌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고부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손화중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주장은 본질이 아니다. 갑오년 1월,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된 고부봉기는 3월 20일 무장기포까지 약 50일간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봉기 주도세력은 좌절과 포기보다는 지속과 확대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것은 고부봉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던 2월 19일, 무장현 공음면 신촌리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모여 회합을 가진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부봉기가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던 시기에 부안의 동학인들은 은인자중하면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안지역 사회에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과 적었을 뿐 아니라 김낙철을 중심으로 한 동학인과 부안 현감을 비롯한 지역의 유지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유하려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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