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도에 있는 간재 사당 단청은 화려하나 경내는 사람 사는 흔적이 없다. 백여년 되었다는 은행나무는 껍질을 벗기고 우두머리를 자른 괴물로 서있다. ⓒ장정숙

기울어진 나라 위정척사로 버티던 외고집

경상도 합천에서 까지 수백명 계화도로 몰려 

임금은 무능한데다 줏대가 없었다. 조정 대신들은 안팎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나라 경영의 방략을 몰랐다. 지방 관헌과 아전들의 횡포는 날로 극심해 갔다. 민초들은 이들의 수탈과 압박에 그저 한숨만 푹푹 쉬며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나라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1876년, 이른바 일본의 운양호가 인천앞 바다에서 쏘아댄 대포 몇 방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 정부는 1910년 3천리 강토와 2천만 민중을 송두리째 일본의 아가리에 갖다 바친다.

1894년 조병갑 고부 군수의 수탈에서 촉발된 농민들의 항쟁에 다급해진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국과 일본을 끌어들였다. 외세의 개입은 급기야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야욕은 이제 그들의 시간표대로 조선을 생으로 삼키는 일만 남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34년, 뒤늦게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 든 일본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죽어간 조선 민중이 얼마며 그 동안 핍박받은 이 땅의 민초가 얼마인가. 한 세대가 넘는 참으로 한 많은 긴 세월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앞서 미국의 대포 몇 방으로 굳게 닫쳤던 쇄국의 문을 연 것이 1854년, ‘서세동점’의 급류 속에서 그들은 아시아에서 빠져 나와 서구 편을 든다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호 밑에 국력을 키우고 군비를 서둘렀다. 막부 체제에서 왕권을 세우는 명치유신을 이루어 냈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외국의 대포 몇 방으로 항구를 개방하고 외교의 문을 연 상황은 무력에 대한 굴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주적 역량이 있었던 반면 우리는 그러한 역량이 없었다.

부안 김형주 교장이 사비로 낸 척재와 후창 전집과 해제본

계화도로 몰려드는 삼남의 선비들

계화도는 바위와 자갈로 뒤덮여 어디다 곡식 하나 심을만한 흙바닥을 찾기 어려운 척박한 섬이었다. 높이 200미터 남짓한 계화산이 덩그러니 제주도의 한라산처럼 솟아 있지만 사방 십리도 못되는 이 섬은 말이 섬이지 갯바닥을 뜯어먹고 살만한 곳도 못되었다. 동북쪽 부안 육지 까지는 십리도 못 되었다. 말이 바다지 음력 초하루와 보름사리 때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닐만한 뻘밭이었다. 바닷가 산언저리 양지 바른 곳 군데군데 겨우 몇 집이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 짐작해 보는 백여 년 전 계화도의 모습이다.
1912년 봄 며칠 동안에  한적한  이 섬에 수십 명의 외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머리에는 굴건을 하고 소매가 넓은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배를 타고 이 섬으로 들어가거나 바지를 걷어 올리고 그 뒤를 이었다. 섬과 가까운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수십 리 밖, 수백 리 밖에서 까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이 외딴 섬으로 선비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때국’(대국, 중국)에 공자 맹자가 있지 안히어 잉, 조선에도 ‘간자’라는 큰 성인이 나셨데. 그 성인이 저 지야도(계화도)에서 성인의 도를 가르친다는 것이여, 그리서 조선팔도에서 선비들이 다 저 먹을 것 싸들고 와서 움막을 치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어.”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간재 전 우 (艮齋 田 愚)선생은 참 괴팍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재주와 덕망은 공자 맹자의 성인에 비길 만큼 출중했으나 왕이 주는 벼슬은 높고 낮은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사양하면서 오직 공맹의 도덕정치를 지키고 외세 오랑캐를 나라 안에 들여 놓아서도 안 되고 그들의 문물을 절대 배격해야 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 오직 임금의 도덕정치를 끊임없이 탄원했다. 거듭된 여러 번의 상소가 헛되자 간재는 아예 홀로라도 저들 오랑캐의 습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도덕을 일으켜 세우겠다며 절해고도 왕등도로 고군 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자신의 몸을 바르게 닦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칠십이 넘은 나이였다. 
공자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한 비록 나라가 오랑캐의 아가리에 들어가더라도 거기 사는 백성, 민족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10년 뒤 100년 뒤에라도 도덕과 윤리는 살아나 왕도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300리 밖 경상도 합천의 선비가 어찌하여 이 외딴 섬까지      

합천의 선비 창수 정형규(蒼樹 鄭衡圭)는 고향 친구 전순형(田舜衡)과 함께 부안 계화도로 간재 선생을 뵈러 온다. 1915년 을묘년 이었다. 거기에는 마침 전부터 안면이 있던 김여종 택술(金汝鍾 澤述)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간재 선생을 뵌 다음 개암동의 흥무왕 김유신 장군 유허비며 우금암의 산성을 거쳐 월명암과 직소폭포까지 두루 살폈다. 실상 창수 일행이 간재 찾아 서쪽으로 떠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09년에도 역시 고향 친구 전기진(田璣鎭)과 함께 고군 산으로 스승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그의 주변에는 공부하는 재실과 숙소가 급조 되었다. 
창수라는 아호는 간재 선생이 지어주었다. 주자의 시 창창곡중수, 울울창창한 골짜기에 꼿꼿하게 선 한 그루 거목이 되라는 그런 뜻이라고 한다. 합천의 선비가 그쪽의 퇴계나 남명 같은 학풍이 확고하게 확립된 지역에서 율곡 우암으로 이어진 학맥을 따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학문의 깊이는 지역과 인맥을 초월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반증이라는 이야기다.
간재는 명실상부한 보수의 두령이었다. 그의 눈에는 조선과 다른 나라는 오직 공자님의 나라 중국뿐이었다. 지난 3천년 동안 중국 대륙 중원에 들어선 왕국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공자의 도가 행해진 나라만이 나라요, 그 밖의 나라들은 짐승과 같은 심성을 가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다. 흔히 동양 삼국이라 하지만 일본 같은 왜놈의 나라는 섬나라라 해서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인성을 갖지 못한 탓에 나라로 보지 않았다. 다른 서양의 모든 나라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오죽하면 이러한 철저한 보수기질에 대해 철종의 부마이자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는 간재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고종에게 간청했다. 모진 말을 삼가는 간재 또한 이완용 박재순 등 ‘을사5적’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다. 

경상도 합천에서 간재 사상의 꽃을 피운 정형규의 창수집(蒼水集)에 기록된 간재선생의 연보. 이 책은 저자의 손자 정화영이 사비로 여강 출판사에서 1958년 펴냈다.

청렴의 화신

서해 위도에서도 수 십리 서쪽 ‘때국의 닭소리가 들린다는 왕등도로 자진 유배된 듯이 몸을 숨겼던 간재가 고군 산을 거쳐 육지와 가까운 계화도에서 1912년에서 1922년까지 생애 마지막 10년을 보내게 된 것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유생들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풍토병 때문이었다. 간재 일행이 뗏목을 타고 무인도나 다름없는 왕등도에 들어 간지 며칠 사이에 이상한 병에 시달렸다. 갑자기 열이 오르고 머리가 혼미해지는 장기(瘴氣)라는 병이었다. 알고 보니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였다.
가까운 산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움막을 짓고 돌을 주워 구들을 놓는 일은 쉬웠다. 하지만 모든 음식은 자급자족해야 했다. 그 많은 책들을 육지에서 실어 날랐고 보리나 조 기장은 물론 간장 된장 까지 각자가 육지에서 조달했다. 수백 명의 선비들이 올망졸망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대학 공동체는 극도의 내핍생활이 요구 되었다. 삼순구식은 아니더라도 하루 한 두 끼로 때우는 것은 예사였다. 그들의 밥상에는 한 해가 다 가도 고기는커녕 생선 꼬리 하나 올라오지 않았다. 젊은 제자들이 그러할 때 80 고령의 스승은 더 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호적이냐

명나라를 숭상해온 조선왕조는 언제부터인지 자기 나라를 가리켜 ‘대명조선’(大明朝鮮)이라 불렀다. 행세하는 양반들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불렀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라는 식으로 명나라 예법을 숭상하는 그런 예의 바른 나라라는 뜻이었다. 이런 정통 유학자가 간재였다. 간재는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호적이냐며 자신은 물론 자식들 이름마저 일본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충성을 바쳐야 할 나라도 없고 나라 덕을 볼 일도 없다는 신념 속에 살았다. 간재의 문인들 가운데 총독부가 시행하는 호적에 이름을 올리거나 세상이  변했으니 신식공부를 해야겠다고 떠난 사람은 간재문인의 공식기록인 ‘연원록’에서 빼도록 했다. 일본 옷이나 신발은커녕 흔히 쓰는 양초다 비누다 종이, 붓, 먹 같은 것도 철저히 배격했다.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패륜의 극치로 여겼다. 신체발부는 부모수지라,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하나도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느냐는 논법이었다. 한말에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자 간재나 간재 문인들은 “어명이라도 공자님의 법에 어긋나면 따를 수 없다”고 버티었다. 하물며 총칼로 나라를 빼앗은 일본 총독부가 전주고 부안이고 한두 개 밖에 없는 보통학교(초등학교) 선생이 가위를 들고 싹둑 싹둑 어린 애들 머리를 잘라대는 데는 침을 뱉았다. 전주 한벽당 옆 초가집에서 상투를 틀고 간재 인맥을 살린 최병심(崔秉心) 선생이나 부안의 김형주 교장의 선고나 백부의 의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케 한다.
간재 전우는 1841년 전주 청석동에서 나서 1922년 일제 강점기에 부안 계화도에서 82년의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선대의 묘가 있는 익산으로 운구 되어 수천 명의 문인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조선 마지막 선비의 의기를 기렸다. 간재 선생의 저술을 모은 간재집(艮齋集)이 간재 가신지 60여년이 지난 1984년 서울 보경문화사와 아세아 문화사에서 영인본으로 나왔다. 최근 들어 한말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논문 선집이 나왔다. 정작 부안에서는 그저 옛날 선비  제사 지내는 사당 정도로 아는 정도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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