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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대회는 언제 결정되었나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09.0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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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촬영한 백산 [경향신문 1972. 08. 16]

1892년 10월부터 1893년 3월까지 계속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은 교조 최제우의 사면복권(赦免復權)과 동학 공인(公認)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외형적인 가장 큰 성과는 전라도와 충청도 감사에게서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침탈을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고, 이를 계기로 동학교단 스스로 조직 정비와 함께 탄압에 맞설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뒷날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할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과 손화중 등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동학농민혁명 지도부가 형성되고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1893년 3월, 금구 원평에서 개최된 이른바 ‘금구취회’에서 확인된다.
그 당시 정황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동학인 3천여 명이 금구 원평에 모여 진(陳)을 이루었는데, 진법(陣法)은 궁을진(弓乙陣)이고, 창의(倡義)라는 깃발을 내걸었는데, ‘충의지사(忠義志士)에게 물어서 일을 도모하여 일본과 서양세력을 쓸어버리자.’고 쓰여 있었으며, 다음 달 2일에 8로[도]에서 행군하여 합세한 후 일본인과 서양인을 축출하겠다.”는 결의를 공공연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봉기 또는 혁명을 구체적으로 수행할 군사훈련과 함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교조신원이라는 종교운동이 척왜양(斥倭洋), 즉 민족자주를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주도할 세력이 조직력을 갖추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분위기가 점차 조성되어 가던 1893년 11월,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을 직접적인 계기로 삼은 「사발통문거사계획」이 전라도 고부에서 결의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4가지로 요약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일반적인 봉기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서울을 점령하여 정권 교체를 이루겠다는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오지영, 『동학사』, 甲午正月初三日 湖南倡義所 全琫準 孫華仲 金開南 등

그러나 「사발통문거사계획」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익산군수 발령으로 보류되었다. 그즈음 전봉준을 비롯하여 손화중과 정백현 등 주요 인물들이 무장에 모였다. 이때 「사발통문거사계획」의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전라 감사 김문현의 폭정에 맞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혁명군이 집결할 장소가 논의되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고부봉기 이후 본진이 머무르며 성을 쌓는 등 전략적인 요충지가 된 백산이 우선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官吏)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폭(强暴)한 도적(盜賊)의 무리를 구축(驅逐)하자 함이니, …”라며, 가장 간결하고 명료하게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을 밝힌 「격문(檄文)」이 발표된 장소를 백산[湖南倡義所. 在古阜白山]으로 명기한 데서 드러난다. 즉 1894년 1월에 호남창의소가 백산에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1893년 12월에 있었던 무장 모임에서 결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고부 관아를 점령한 군중은 말목장터와 백산으로 본진을 옮기며 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2월 19일, 전봉준을 비롯하여 김개남과 손화중, 김덕명과 정백현 등 백산대회에서 지도부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 무장에서 다시 회동하였다. 이때 어떤 논의와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뒤 정황을 보면, 고부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논의했을 가능성과 함께 백산대회가 결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이 자리에 참석한 김개남과 김덕명 등이 무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백산에 합류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오지영, 『동학사』, 甲午正月十七日 湖南倡義所 古阜在白山

또한 전봉준과 손화중은 무장에서 이른바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선포한 뒤에 고창과 흥덕을 거쳐 고부를 다시 점령한 뒤 백산으로 향하였다. 이 과정은 전봉준과 손화중의 이동 경로인데, 김개남과 김덕명, 최경선 등 다른 주요 지도자들은 이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로 보아 2월 19일에 있었던 무장 회동에서는 고부봉기의 지속과 확대가 논의되었고, 이때 혁명군이 지향하는 강령과 함께 혁명군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직과 군율(軍律), 나아가 일반 백성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알릴 선언문 등이 결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남 일대 동학농민군이 총집결할 장소로 백산이 결정되었을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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