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부안이야기’를 이끌어온 치과의사 신영근 이사장

뜻 맞는 사람들과 부안 위한 ‘한 길’로

부안이야기와 부안역사문화연구소 두 날개의 몸통

 

심부름 잘 하는 소년 

“아버지는 중학교 교사였다. 아버지가 사람이 좋아서인지 시도 때도 없이 동료 선생님들을 몰고 오셨다. 나는 그때마다 큰 주전자를 들고 가게로 막걸리를 받으러 다녔다. 어머니는 솜씨가 좋고 어찌나 손이 빠른지 금방 술안주를 만들어내셨다. 아버지는 손님들을 대접하려고 매실주를 담갔다. 때로는 포도주를 담갔는데 30도 소주에 노랑 설탕가리를 넣으시던 모습이 남아있다.

부모님과 6남매. 다섯째인 신영근은 뒷줄 오른쪽 끝

4남 2녀 중 다섯째인 나는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다. 근데 어려서부터 집안 심부름은 도맡아 했다. 뭐 때로는 귀찮기도 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무언의 압력도 있었다. “영근이는 심부름도 잘하고 속이 꽉 찼당게”라는 칭찬이 뒤따랐기 때문인가. 새로 옮겨 살던 한옥은 성황산 밑 뾰족집 옆인데 너무 낡아서 아버지는 고치기로 했다. 오래된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얹는 작업이었다. 가족들이 황토를 날랐다. 옛집을 살기 편하게 고치기 시작하는데 마루와 방 세 개를 들여야 여덟 가족이 살 수 있었다. 고치고 나서도 옛집이라서 외풍은 심했다. 집 수선이 어디 쉬운가. 집고치는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목수를 대야 하는데 알음알음해서 목수를 대다보니 우리 집에서 꼭 필요한 때에 데려가라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어서 별반 진척이 없었다. 그날 밤도 야심했는데, 아버지가 성황산 밑에 사는 목수 임씨 아저씨 댁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근데 그날따라 무서움이 더 확 들었다. 우리 집 옆의 뾰족집에서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는 이 집 앞만 지나가다 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집 앞을 지나 성황산 밑까지 심부름을 가다니. 골목은 컴컴했고 등에서는 연신 땀이 났다. 그날 임씨 아저씨 집을 어떻게 다녀왔는지 모른다. 앞만 보면서 달리다시피 하면서 어둔 길을 걸었다. 아직도 그 나이로 돌아가면 성황산 밑은 무서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안동초등학교 6학년3반 친구들. 뒤에 일본인 대지주 가와노(천야장구)의 철근 콘크리트 2층 사무실과 일본식 저택이 보인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읍내서 소풍가는 곳이라면 석동산이 고작이고 좀 멀리 간다면 개암사다. 오리정을 지나 화장터와 학당고개를 거쳐 석동산에 이른다. 부안 김씨의 비석이 즐비하고 전주 최씨의 선산도 있었다. 소풍이란 게 도시락 까먹는 재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개암사로 소풍을 갔다. 가을이어서 절에 있는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아직은 먹지도 못하는 땡감인데, 어디 학생들이 떫은지 익었는지를 구분하던가. 호기심으로 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지째 꺾거나 몇 개를 손에 움켜 쥔 동무들이 스님에게 잡혔다. 걸린 아이들도 잘못한 것을 아는지라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대웅보전에 들어가서 108배를 하란다. 명절에 절 몇 자리 밖에 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격식을 갖추고 하는 절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풍이나 운동회에는 장사들이 가지고 온 단물(빨강 삼각형)을 1원 주고 사서 빨고 다녔다. 여기다가 욕심을 조금 더한다면, 칠성 사이다를 사가지고 소풍을 갈 수 있을까가 큰 관심이었다. 사이다 맛을 본 아이들 표현에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다.”
10여 년 전 ‘부안이야기’에 쓴 신영근의 어린 시절이다. 짧은 글 속에도 1970년대 전후의 부안읍내 풍경이 핸드폰 화면처럼 또렷하다.  

‘부안이야기’ 걸머지고 10년

부안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자랑스러운 2개의 문화단체가 있다. 다 같이 부안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부안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만든 단체인데,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일을 하는 단체이다. 필자는 이런 단체가 있는 줄은 알았으나, 실상 그 운영을 누가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고 지냈다. 짐작이라도 하게 된 것이, 필자가 ‘부안독립신문’에 매주 신문 지면 한 면을 온통 차지하는 ‘김진배가 만난 사람’ 인터뷰를 하면서다.
- ‘부안역사문화연구소’가 먼저입니까? ‘부안이야기’가 먼저입니까? 신 원장께서 오랜 동안 이사장으로 계셨는데, 누가 어떻게 만든 겁니까?
“글쎄요. 제가 만든 것은 아니고요. 다만 제가 심부름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깐 저한테 떠맡긴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특별히 나이가 많거나, 돈을 더 내놓거나, 시간을 더 내 놓은 것은 아닙니까?
“그 세 가지 다 저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마침 핵폐기장(방폐장) 반대투쟁에서 그런 시설을 부안 땅에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데는 온갖 고처를 겪으면서 성공했지만, 그 뒤 몇 년 동안 이상하리만큼 반동의 분위기에 휩싸였어요, 그래 부안에 있는 치과의사나 약사, 전교조를 한 고등학교 선생님들 몇 분, 법무사, 화가, 시인, 직업이 아주 다양하지요. 이분들 몇몇이서 우리가 이제 차분하게 부안의 역사와 문화를 캐고 가꾸자 해서 만든 것이 ‘역사문화연구소’이고, ‘부안이야기’죠. 두 조직이 사실 이름만 다를 뿐, 운영하는 분들은 거의 겹쳐 있습니다.”

초창기의 얼굴들-특이한 공동체 룰

이들은 2008년 6월에서 2009년 4월까지 여러 차례 준비모임을 한 다음, 1년 뒤인 6월 발기인 총회를 연다. 이른바 15명의 챠터 맴버(창립회원)다. 김광석, 김상훈, 김병환, 김중기, 김병채, 김현채, 서 융, 신영근, 여운길, 전경목, 정재철, 정종순, 조재형, 최창모, 허철희 등이다. 2009년 10월 25일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해 12월 치과의사 서 융의 집이 있는 작당의 ‘변산 바람꽃 펜션’에서 연구소 회의를 연다. 이때 멤버가 김병남, 김병환, 김중기, 서 융, 정재철, 정종순, 허정균, 허철희 등이다. 이때 언론인이자, 부안여중고 재단 이사장인 김석성과 오랫동안 향토 교육과 역사 문화 발굴에 힘써온 김형주 부안여중고 교장을 고문으로 모셨다. 연구소장에는 백산고등학교 역사교사 정재철, 연구 간사에는 김병남, 실무 간사에는 김중기의 진용이었다. 연구원은 김병남, 김병환, 김종운, 김중기, 서종원, 신영근, 전경묵, 정재철, 정종순, 허정균, 허철희 등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팀에는 별 변동이 없다.
흔히 이름을 뭐라 붙이든 간에 단체를 만들면 큼지막하게 간판 달고, 그럴듯하게 여기 저기 짜집기 해서 정관 만들고, 뜯어 먹거나 기댈 연구를 하거나, 감투싸움으로 밤낮을 보내는 것을 흔히 본다. 이들의 모임은 이런 작태와는 천리나 떨어져 있다. 돈 벌 연구 하지 않고 어디 기댈 곳 찾지 않는다. 자기들 돈 형편 되는대로 낼 뿐 한 사람의 유급직원도 두지 않았다. 같은 회원 사이에도 자기가 알아서 돈을 내면 그만이지 돈 좀 더 냈다고 유세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는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기본으로 내가 사랑하는 부안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제대로 알고 많은 사람이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해도 떳떳하게 사는 공동체를 희구한다. 이 조직의 핵심이 부안에 기반을 둔 자영업자로 구성된 것도 이런 연유인 듯하다. 이들은 부안군청 앞에 보아란 듯이 ‘부안평화의 소녀상’를 세울 것을 ‘부안독립신문사’에 제안해 관이나 돈 있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천 명이 넘는 민초들이 천원 만원 십만원의 정성으로 세우게 된 것도 부안사회가 이만한 자세와 역량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지역 소녀상이 ‘울밑에 선 봉선화’같은 처량한 모습인데 비해 부안의 소녀상은 서서 두 주먹을 쥔 소나무나 대나무, ‘인동초’ 같은 기상이다.
필자는 몇 달 동안이나마 이들의 일하는 것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랐다. 이들은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 듯하다. 회의를 통해서 충분히 자기 의견을 개진하도록 한다. 몇 시간이고 늘어지고 하는 회의가 아니고, 대게 일 끝난 6시에 모여서 식사 시간 포함해서 2시간이면 끝낸다. 의견을 제시하지 남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회자다. 사회자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방향이 아니겠느냐, 해서 동의를 얻도록 한다. 흔히 투쟁단체들은 개성이 강하고, 자기 고집이 세다. 과격하거나 속결 처리한다. 이들은 이와 다르다. 방안을 흐르는 공기를 차분하게 느끼고 자기를 그 속에 동화한다. 
 
치과의사 ‘신영근(辛永根)'

몇 일전, 서울 광진구 군자동 ‘미라클 아트홀’에서 조촐한 음악회가 있었다. 듀오 콘서트인데, 여기에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말쑥한 60대의 노인이 연미복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등장했다. 이태리 가곡, ‘넬 코르 퓨논 미센토’를 뽑았다. 그가 부안 읍내 공용버스 터미널 네거리 2층에서 20여 년 동안 하얀 가운, 하얀 마스크 넘어 손님의 입에 손가락과 핀셋을 집어넣는 ‘신영근치과’의 신영근 원장이다. 그는 공연 전 한 달 동안 병원 일이 끝나는 한두 시간 동안이나마 진찰실 옆에 붙은 두세 평 되는 방에서 ‘누가 들을까’ 혼자서 악보를 외우고, 목청을 돋우었다. 어쩌면 미남에다가 구김살 없이 커온 그의 어린 시절의 끼가 평생을 따라다녔는지 모른다.

‘미라클 아트홀’에서 열린 듀오 콘서트에서 이탈리아 가곡 ‘넬 코르 퓨논 미센토’를 열창한 바리톤 신영근

대학 갈 때가 되어 처음 그가 원한 곳은 음악대학이었다. 부안동초등학교, 부안중학교를 거쳐, 이리고등학교에 들어간 그는 음악회에서 몇 번인가 독창을 한 일이 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도 다른 것은 몰라도 노래라면 손을 들고 “저요, 저요.”하고 소리쳤다. 중학교 체육교사이던 아버지(신영달辛泳炟)께 음악대학을 가겠다고 넌지시 여쭈었다. “이놈아, 음악대학 가 가지고 밥벌이가 될 것 같아?” 아버지는 한 마디로 자기의 뜻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대 외에는 갈 대학이 없는 듯이 보였다. “아 이놈아, 법과대학이나 상과대학을 나와야 어디 월급쟁이라도 하지. 의과대학 나오면 평생 취직 걱정은 없고.” 여기저기 들어갈 만한 곳을 고르다가 조선대학 치과대학에 진학했고, 그 대학원에서 치과학박사를 했다. 개업 얼마 전에 1983년 치과대학을 졸업하자, 바로 그 해 고향 부안에서 겁 없이 개업을 했다. 전에 구시장 상호신용금고 2층에서.
- 왜 특별히 고향에서 하시게 되었습니까?
“그게 다 인연인 것 같아요. 학교를 나오면, 군대를 가야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대구 군의학교에서 3개월 동안 군의관 훈련을 마친 다음에, 현역 육군 중위로 부안보건소에서 공익근무를 했어요. 물론 사복을 입었죠. 월급도 육군 중위 1호봉 159,000원을 받았어요. 부모님 밥 얻어먹고, 어렸을 때부터 살던 집에서 자고, 보건소 근무하고,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죠.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보건소에 오시는 분들이 더 어려운 분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참 열심히 일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런 분들 믿고 부안에서 개업한 것이죠.”
부인 황영희 여사(63세) 와의 사이에 30 전후의 두 딸이 있다. 두 딸은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만난 날이 신원장의 63회 생신 8월 28일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생신축하 화분이 진찰실 옆 탁자위에 놓여있었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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