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들이 서로를 부를 때 “서울떡”, “부산떡”, “정읍떡”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렸을 때는 이것이 무슨 떡인가 의아해하며 어머니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집 온 새댁이 서울에서 왔으면 “서울떡”, 부산에서 왔으면 “부산떡”이라 부른 것이다. 이때 “떡”은 “댁”의 사투리로서 “서울댁”, “부산댁”, “정읍댁”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5-60대가 되어도 여자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없는 거나 다름이 없는 시절이었다. 이름이 있어도 불러 주는 사람이 없었고 자라온 고향의 이름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대신할 뿐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시골에도 또 다른 풍경이 생기게 되었다. 주변에 새로 온 새댁의 이름이 “베트남댁”, “필리핀댁”으로 바뀌게 되었다. 농촌 총각이 결혼하기 힘들어서 외국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고 이에 다문화 가족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도 다문화가족들을 보는 것은 서울에서 외국인을 접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되었다. 그만큼 현시대가 세계화가 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에 시집오거나, 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을 여전히 외치며 유교문화에 젖어 있으며 세계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들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건네거나 그들의 인사말로 인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이후 7-80년대의 산업화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들을 파견하였으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사우디 등에 많은 해외 인력을 보내는 등 한 때 이방인으로서 힘든 시절을 겪은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한국이 G20 국가에 참여할 정도 경제력이 성장했으며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제3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돈을 벌기 위해 계속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산업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어려웠던 이방인의 모습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그들을 무시하며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고 불과 30-4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며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다문화 민족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어려운 시절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도움은 평생을 두고 가슴에 남기 마련이다. 다문화 민족들은 멀리 있는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고 우리의 힘든 부분을 감당하며 일하고 있다. 다문화가족이 생기지도 20여년이 넘어가고 있다. 초등학교에 많은 다문화가족의 어린이들이 있지만 대학교와 사회 초년생의 스무 살을 갓 넘긴 다문화가족의 자녀도 있다. 이제 그들은 우리의 자녀와 사귀면서 결혼할 연령이 되었다. 다문화가족의 자녀와 결혼한다면 사돈관계가 될 것이고 우리와 관계가 있는 인척지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아들딸들의 며느리와 사위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단일민족이 아닌 혼혈민족 아니 다문화민족이 되어 가고 있다.
내 주변에도 여려 명의 다문화민족 친구들이 생겼다. 한편으로 그들에게 애틋한 마음도 있지만 자신 있게 그들에게 말한다. “우리나라도 70-80년대에 해외에 나가 일 한 적이 있으며 해외에서 결혼한 사람도 많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우리나라에 외화를 벌여 들여왔고 현재 우리나라는 그들의 종자돈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너희도 열심히 일하면 잘 살 것이라고……” 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하인이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존재이다. 그들은 노동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우리는 품삯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또한 다문화민족으로서 우리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여유 있고 배려 깊은 성숙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 세계 속의 한 가족으로서 우리의 이웃임을 깨닫고 같이 어울리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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