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동학의 새로운 조명② 백산성서 봉기 이유 널리 알리고 부안 동학 소리없이 움직이는데…

백산성 전경 ⓒ 염기동 기자

1894년 음력 3월 25일(양력 4월 30일) 무렵, 부안 백산성(白山城, 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1번지) 일대에는 거대한 흰색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백산성 위로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땅과 사람이 하나의 색깔로 서로 어울리고 있었다.

농민군은 왜 백산성에 모였나-
‘백성 살릴 수 있는 땅’이라 널리 퍼져...식량조달 쉽고 모이기 쉬운 교통요지


이 때, 모여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바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약 4천여 명을 비롯하여,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 각 동학 접주들이 이끄는 농민군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죽창이며 각종 농기구가 들려 있었고, 출신 고을을 알리는 각종 깃발들이 쥐어져 있었다. 복장은 모두 흰 옷이었고, 모여든 농민군 숫자는 무려 8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 속에는 당연히 부안 출신 농민군들도 다수 참가하고 있었다.(오지영, 『동학사』)

동학농민군들은 왜 백산성으로 모여 들었을까?

첫째, “고부백산(古阜白山)이 가활만민(可活萬民)”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당시의 백산은 고부군에 속해 있었는데, 당시 이 일대 민중들 사이에는 “고부의 백산이야말로 만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땅”이라는 비결이 널리 퍼져 있었다.(파계생, 「전라도 고부민요일기」 참조) 이 때문에 농민군들은 백산으로 가면 길(吉)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백산성은 농민군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조달하기가 대단히 쉬운 이점이 있었다. 백산성은 지리적으로 세 방면이 모두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쪽 방면만이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있는 육지였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2006년 1월 6일 필자의 백산성 답사에 동행한 부안 현지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관개시설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당시에 물이 풍부한 백산성 주변은 조선 땅 안에서도 매우 이름이 난 벼농사 지대, 즉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백산성 근처에는 가을이 되면 생산된 벼를 세금으로 거두어 보관하던 작은 창고(社倉)들이 여러 곳이나 있었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농민군들은 식량조달이 비교적 쉬운 백산성으로 모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백산성은 근처에서 홀로 높아(「전라도 고부민요일기」), 사방에서 모여들기 쉬운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백산성은 해발 48m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낮은 야산에 불과하지만, 사방에 높은 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도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이런 교통상의 이점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던 농민군들이 백산성으로 모여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대지와 자연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민중들의 생활세계(生活世界) 속에 배어 있던 생활의 지혜들이 바로 농민군들로 하여금 백산성으로 자연스럽게 모여 들게 한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백산성에 모인 동학농민군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왜 죽창을 들고 봉기할 수 밖에 없는가를 만천하에 고하는 일이었다. 백산에 모인 농민군들은 우선 먼저, 1894년 음력 3월 20일에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당산(堂山, 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시내 마을)에서 전면적으로 기포(起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격문(檄文) 속에 담아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하였다. 여기에 저 유명한 「백산격문」의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우리가 의로운 깃발을 들고 여기에 이른 것은 그 참 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하급 관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이들이니,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오지영, 『동학사』)”

이 「백산격문」만큼 일찍이 동학농민군들의 꿈과 소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글은 없다.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한다”는 내용은 농민군의 봉기가 바로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가르침을 널리 펴면서 밝힌 「덕을 펴는 글(布德文)」에서 강조했던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실천에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고,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는 내용은 동학농민군의 봉기 목적이 안으로는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개혁하는 반봉건(反封建) 근대화에 있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반외세(反外勢) 자주국가 건설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국안민! 반봉건 근대화! 반외세 자주화! 이것이 바로 1894년 음력 3월 25일, 백산성에 모인 8천 여 동학농민군들이 외친 의로운 함성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농민군들의 염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백산격문」 포고가 이루어진 지 이미 한 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렀건만, 「백산격문」에 담긴 농민군들의 꿈과 소망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 현재진행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실이기에 지구촌 시대인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백산성을 오른다. 1세기 전 농민군들이 「백산격문」에서 선명하게 제시했던 민족적 대의를 다시금 가슴 속에 아로새기기 위하여!

부안의 백산성에 모인 농민군들이 보국안민과 반봉건 근대화, 반외세 자주화라는 봉기의 대의를 정정당당하게 포고하고 있을 무렵, 부안 동학의 또 다른 움직임이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월 선생이 뿌린 동학의 씨앗이 결실을 향한 개화(開花)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성에서 바라본 부안읍내 ⓒ 염기동 기자

부안 동학 1890년에 싹터...이듬해 도인수 수천 달해

남아 있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부안 동학의 뿌리는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낙철역사』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해서 부안 동학의 뿌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안동학의 뿌리
1890년 음력 6월에 쟁갈마을(현 부안읍 봉덕리) 출신 김낙철 김낙봉 형제가 처음으로 동학에 입도하다.



1890년 7월부터 김낙철 형제가 부안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 포덕을 시작하여 이듬해 3월경에는 따르는 동학 도인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르다.



1891년 3월 김낙철 형제를 비롯하여 부안 옹정마을(현 부안읍 옹중리) 출신 김영조(=김석윤), 무장의 손화중 등이 충청도 공주 신평에 은거하고 있던 해월 선생을 배알하다.



1891년 7월에 해월 선생이 부안 신리(新里)에 있는 윤상오(尹相五) 소실(小室) 집을 거쳐 옹정리 김영조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간 머물다. 윤상오는 1881년 이미 해월 선생을 배알하였으며, 1883년에 공주에서 간행된 『동경대전』 발간 과정에 유사(有司)로 참여할 정도로 동학 신앙의 뿌리가 깊은 인물이었는데, 당시 그의 작은 부인의 집이 부안 신리에 있었다.



1891년 7월 해월 선생이 부안을 거쳐 다시 태인 김낙삼의 집을 방문하다. 이 자리에서 해월 선생은 동학의 장래에 대해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는 법설을 하다.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때에 김낙철 형제와 김영조 등이 부안의 동학도인수백명을 이끌고 참가하다. 이 때 김낙철은 도도집(都都執)의 직책을 맡다.


1894년 4월 1일, 김낙철 대접주가 이끄는 부안 농민군이 기포하여 서도면 송정리(현 행안면 송정리) 신씨재각(辛氏齋閣)에 도소(都所=執綱所)를 설치하는 한편, 김 대접주의 동생 김낙봉(金洛鳳)과 신소능(申少能)으로 하여금 부안 줄포에도 도소를 설치하도록 하다.



이후, 김 대접주가 이끄는 부안 농민군은 현감 이철화(李哲化)와 긴밀한 협조체제 아래 부안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다. 이 덕분에 흉년을 면하기 위해 부안 줄포로 식량을 구하러 왔던 제주어민 50여명이 김 대접주의 덕분으로 무사히 식량을 구하여 제주도로 돌아감으로써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굶주림을 면하게 되다.
(중략)



1894년 12월 11일 김낙철 대접주 형제가 부안현감 윤시영에 의해 체포되다. 12월 21일 김낙철 대접주 형제가 나주수성군에 넘겨지고 ,같은 날 다시 나주에서 올라온 일본군에게로 넘겨져 나주로 압송되다.

위의 내용을 통해, 부안 동학은 1891년경에 도인수가 벌써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탄탄한 조직망을 이루고 있었으며, 1893년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3월의 제 1차 동학농민혁명 때도 봉기하여 송정마을과 줄포 두 곳에 집강소를 설치함으로써 이른바 민중자치(民衆自治)를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갑오년 당시 김낙철 대접주 관내였던 부안 지역의 치안이 잘 유지됨으로써 흉년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해월 선생이 뿌린 부안 동학이 맺은 ‘아름다운 결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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