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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논단] 공동체, 아! ‘부안 공동체’기적은 우리들의 ‘티끌만한 믿음’에서 온다

지난 가을 아내가 난데없이 중병아리 세 마리를 가져왔다. 아는 이가 애지중지 키우는 토종닭 어미에게서 직접 깬 병아리를 특별히 분양해 준 것이란다.

밖으로만 나다니느라 집안 일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버거워하던 터라 생각해 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당장 저걸 어쩌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 내 속 사정에는 아랑곳 없이 아이들은 마치 새 식구라도 생긴 양 좋아라 뛰고 야단이다. 언제부터 강아지 한 마리 키우자며 졸라대는 것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어 오던 참이다.

어쨌든지, 그렇게 우리 집에 들어 와 살게 된 그 닭들이 얼마 전 알을 낳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우습다. 처음 새끼 때는 행여 떨어지면 죽을세라 서로 꼭 붙어 다니던 놈들이 지금은 각각 제 살림이다. 아이들이 ‘이순신’이라 이름 붙여 준 수탉은 아침 홰만 치고 나면 혼자 밖으로 나돌다가 저녁 무렵에야 집을 찾아들곤 한다. 저 놈들도 붙어 살아야 할 때와 적당히 떨어져 지내야 할 때를 아는가 보다.

공동체, 누군가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해 두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며, 서로에게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의 일로 만들 줄 아는 헌신의 마음을 개발시킨 사람들.’ 그의 말대로라면, 그렇다! 부안은 거대한 공동체였다. 오월의 광주처럼, 그리고 지금, 두 해째 삭풍을 맞아 견디며 끝내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평택의 농민들처럼.

아직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던 시절,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던 때가 내게 있었다. 그 중 하나, 도시빈민들이 모여 만든 한 신앙 자활공동체에서의 경험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날마다 이어지는 긴장과 대립, 갈등. 당시 내게는 배겨내기 어려운 ‘수행’ 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내 안에서 공동체에 대한 꿈을 사실상 접어 두었다. 그러나 부안은 가끔씩 접어 둔 그 꿈을 내게 펼쳐 내보이곤 한다.

‘일 속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사회변혁의 힘을 정치체제의 변혁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도들과는 상대되는 말이다. 즉, ‘권력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는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이라 할지라도 사회문제의 진정한 해결이라는 점에서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으며’, 이와는 달리 ‘사람들이 공동의 일과 목표를 두고 스스로 유기적인 조직을 만들어 갈 때 거기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도우며 저마다 성취에 이르도록 해 주는 자연스런 창조성과 결단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생각이다.

운 좋게도 부안은 쉽지 않은 두 체험(‘공동체’와 ‘일 속의 민주주의’)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일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공동체’와 ‘일 속의 민주주의’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공동체’도 ‘일 속의 민주주의’도 모두 잃었다. 우리가 바라보았던 ‘공동의 일과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과 목표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정작 깨부수고 떨쳐버려야 했던 대상은 핵마피아들과 그의 협잡꾼들이 들이대는 위협과 공포의 칼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김○규’라는 보통명사로 통하게 되는 ‘반민주, 반평화, 반생명’의 싹을 애당초 내 안으로부터 뽑아 버려야 하는 일이었던 게다. 눈에 보이는 위협과 공포(핵폐기장 문제)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너무 서둘러 눈을 돌려버린 터였다. 그래서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짜 ‘김○규’(내 안의 ‘김○규’)를 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아무려나, 부안의 체험은 내게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기억이다. 궂이 ‘안타까운’이라 말함은 그것이 지금으로 이어지지 않은 어제의 일이기 때문이며, 내일 또 다시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이다. 지난날 부안은 결코 쉽지 않은, 아니 ‘기적’같은 일들을 이루어냈다.

나는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우리 각자의 ‘티끌 만한 믿음’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믿는다, 지금 ‘광야’를 지나는 동안 우리의 믿음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처럼 수백 수천 배 크기로 자라나 끝내 거대한 공동의 뿌리를 박게 되리라는 것을.

이제, 봄. 녹은 땅을 갈아엎듯, 부안을 한바탕 신나게 갈아엎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눈에 보이는 이기고 짐에는 크게 마음 두지 않겠다. 그것은 검은 속살을 드러내며 돌아눕는 한갓 흙덩이의 전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내 안의 ‘김○규’를 끝내 내버리지 못하게 될까 하는 것이다.
 

김효중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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