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포에 살던 일본인 파계생이 쓴 『전라도고부민요일기』

고부 분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1894년 1월 10일,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한해 전 11월에, 조병갑을 대상으로 한 고부관아 점령은 물론 전라 감영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세웠으나 조병갑의 익산 군수 발령에 따라 유보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이 유임운동을 통해 다시 부임할 것을 예상하고, 고부관아를 점령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의 상황을 부안의 유생(儒生) 김방선(金邦善. 1843~1901)은 『임하유고(林下遺稿)』[갑오 구월  「제행일기(濟行日記)」]에 “1894년 1월 일,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서 민란(民亂)이 시작되었다. 군수 조병갑이 끝없는 탐욕스러움과 포학함으로 정해진 이외의 세금을 수탈하자, 백산(白山)․화호(禾湖․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등지에 쌓아 둔 수천 석의 곡식을 고부 군민들이 가서 먹어치우고는 모여서 난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였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과 수탈로 고부에서 난이 일어났으며, 백산과 화호에 쌓아 놓은 양곡을 탈취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는 “(전략) 진을 옮겨 백산에 머물렀으며, 군중의 희망에 따라 전봉준이 대장이 되었고, 대장기를 상징하는 깃발에 보국안민(保國安民)을 특별히 큰 글씨로 써서 내 걸었다. 그리고 봉기의 본뜻을 적은 격문을 지어 사방에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부봉기 이후 백산으로 진을 옮긴 것과 전봉준을 혁명군 총대장으로 정한 백산대회가 뒤섞여 있으나 고부봉기 후 백산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고부 관아 점령 이후 소강상태를 이루던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그 당시 줄포에 살았던 파계생(巴溪生)이라는 일본인이 쓴 『전라도고부민요일기(全羅道古阜民擾日記)』에는 “(1월) 20일 아침 저들 무리 30~40명이 내가 있는 줄포(茁浦)를 지나갔는데, 각기 죽창을 갖고 있었다. 들으니 그들은 강 건너에 사는 고부 농민으로서 본영(本營)으로 모이러 가는 것”이라고 했으며, “민군(民軍)의 수령은 앞서 비밀리에 58주의 동학당에게 격문을 띄워서 자기들의 목적은 다만 한 군의 이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선 전운영(轉運營)을 파괴하고 나아가 폐정(弊政)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며, 고부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전망하였다.
그리고 “(전략) 공격과 수비에 이롭지 못한 점이 있어 백산이라는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백산은 조선의 비결(秘訣)에도 적혀 있을 정도의 땅으로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일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다닐 수 있으며 근방은 유명한 평야로서 백산만 우뚝 높다. 비결에 이르기를, ‘고부의 백산은 만민을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하여 백산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부안읍 동문 중리에 살던 유생 김방선의 『임하유고』

한편, 고창의 유생 조의곤(趙毅坤)의 문집 『동오유고(東塢遺稿)』의 잡저(雜著)에 수록된 「갑오사기(甲午事記)」에는 “고부 민란의 괴수(魁首) 전명숙(全明叔)이 한 지역의 백성들을 이끌고 수개월을 백산(白山)에 머물렀다.”라고 하여 백산에 수개월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백산과 지척지간인 현재의 주산면 백석리 홍해마을에 살았던 기행현(奇幸鉉)이 쓴 『홍재일기(鴻齋日記)』에는 1월 29일 즈음에 “고부민란이 더욱 심해졌다.”고 했으며, 2월 1일에는 “부안 현감이 고부 군수를 겸하게 되어 어제(1월 30일) 고부로 갔다.”고 하였고, 2월 11일과 25일에는 “고부민요가 사방으로 번지고 있다. 고부민란이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2월 27일에는 “고부민란으로 인해 본 읍에서 수성군을 모집하였다.”고 하여 고부의 봉기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병갑의 후임으로 부임한 박원명이 군중을 진정시킬 즈음, 안핵사 이용태가 와서 작폐가 아주 심하였음도 함께 전하고 있다.

주산면 백석리 홍해 마을에 살던 기행현이 쓴 『홍재일기』

같은 해 3월 1일, 전봉준은 줄포에 있는 세고(稅庫)를 점령하여 군량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3월 3일에는 소극적으로 가담했던 군중의 귀가(歸家)를 묵인하였는데, 같은 시기에 영광․순천․진안 등지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이 들렸다. 3월 10일에는 사냥꾼에게서 총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 약 3,000여 명이 금구에서 태인을 거쳐 부안(扶安․백산)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전봉준은 3월 13일에 “부하 50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가 무장의 손화중에게 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임하유고』와 『김낙봉이력(金洛鳳履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백산은 고부봉기에서부터 무장기포 이전까지, 즉 고부봉기 당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고부와 무장을 거쳐 전라도 일대 동학농민군이 모두 모여 혁명의 대오와 기치를 내걸은 백산대회가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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