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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사람 29>융약국(육약국) 육진수 약사
꼬박 8시간의 일이 끝나고 모시옷으로 갈아 입은 육진수 약사 ⓒ장정숙

“그저 정성을 다할 뿐이죠”

서외리 한자리서 47년
아침 7시 반 약국 문 열어

육약국의 육진수(陸鎭洙)사장을 어렵게 만났다. 몇 달 전부터 졸라온 인터뷰 요청에 “제가 요?”하고 가볍게 손을 내졌더니 다음엔 시원해지면  천천히 하자 했다. 아예 강권을 하여 오늘 일 끝나면 여기 약국에서 셔터 내리고 한 시간쯤 이야기 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졸라서 하게 된 것이 이 인터뷰다. 7월 29일 오후 7시.
 
- 부안독립신문이 바로 이 약국 건물 3층에 있어서 한 달에 서너 번 오며 가며 그저 인사합니다만 사장님 나이나 지나온 일을 잘 모릅니다. 그리 아시고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우선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51년 3월 13일 입니다. 우리 나이로 69세”
-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내년에 칠순을 맞이 하는데……
“그저 어제 하던 일 오늘 하고 오늘 한 일 내일 또 하고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사실 세월 가는 걸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 언제까지 일 하실 생각이신지?
“글쎄요, 언제까지 할 지 그런 거 생각 안 해 보았으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건강이 허용하는 대로 일 해야지요.”
- 초탈한 분 같습니다. 종교를 갖고 계신지?
“성당에 나갑니다. 부모님 때부터”
- 나신 곳은 부안입니까?
“아니오, 전주지요. 전주시 고사동 1가 408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 다녔지요. 여기 저기 이력서 낸 일도 없고 그런 걸 쓸 일도 별로 없지만 전주초등학교 입학-졸업, 전주북중 입학-졸업, 전주고등학교 입학-졸업 쓰다보면 내 인생이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1972년 원광대학 약학과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에 복무한 다음 바로 약국 개업한 곳이 바로 부안이요, 그 자리가 지금 약국 자리라고 했다.

신부님을 모시고

친구 따라 부안으로 

- 부안과는 어떤 인연으로?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인연이었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염길태 라고 친구가 있었어요. 중고등학교에 대학 약학과 까지 10년 줄곧 동창이지요. 이 친구가 곰소 친구예요. 이 친구 따라 곰소 가고 오는 길에 부안 읍내도 몇 번 들렸어요. 변산 해수욕장이나 격포 채석강 같은 데도 같이 갔고, 이 친구가 부안 읍내서 약국 열면 괜찮을 거라 해서……”
- 대단한 결단이었군요.
“결단이라기보다 뭐 한번 해볼까 하는 호기심 이었겠지요.”
- 그 친구도 부안이나 곰소 같은데서 개업했습니까?
“뭘요, 이 친구는 부여에서 개업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두었다던가.”
친구 따라 부안에 오듯이 육 약사는 성당에서 부인 양현자 여사(54년생)를 만난다.
-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약국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토대가 잡히지 않은데다 빨리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였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병환으로 오래 누워 계시는데 진수 저놈 장가나 보내고 가야 할 텐데 그것이 소원이라 하셨대요, 어머님이나 제 장모 되실 분은 같은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같이 하셨답니다.”
- 그래 중매는 누가?
“두 어머니들이 같은 ‘레지오’ 단원이거든요. 그래 우리 어머님이 그쪽 어머님께 이야기해서 아버님 소원을 풀어드린 셈이지요. 그 바람에 저는 효자가 됐고. 약국 개업 2년 뒤에 전주에서 결혼했는데 권영균 신부님이 혼배 성사를 해주시고…… 그 사람은 결혼 전에 성당에서 딱 한번 보았어요.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총으로 지금도 복을  누리고 있어요.”

오랜만의 외유 제주도 성산포에서

목조 10평 집이 3층 철근 270평으로

육진수 약사가 서외리의 남쪽 끝자락에 10평짜리 목조 브로크 전세를 얻어 ‘육약국’의 간판을 걸 때 1976년만 해도 부안 인구는 12만이었다. 40여년 뒤인 지금은 그 반 토막이 잘려 부안 사람은 어디론가 떠나 지금은 6만을 밑돈다고 한다.  이런 농촌 소도시 인구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부안 읍내 도심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뻗어가 1만 남짓이던 도심은 2만에 육박한다. 사통팔달의 시내버스 교통 편의는 고령인구의 증가와 의료보험의 확대에 편승, 시장으로 은행으로 병원으로 보건소로 약국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부산하게 만들고 있다. 상·하서와 줄포 변산 진서에서 읍내로 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시내버스 터미널에 가기 전 서부 정류장에 내린다. 읍내 약국 수도 육약사가 개업하던 시기 10여개에서 30여개로 늘었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해졌다.
- 부안에서 ‘융약국’(필자는 ‘육약국’이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흔히 ‘융약국’이라 부른다.) 이 제일 크고 이름이 알려졌다던데 그렇습니까?
“매장 크기만 보면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름이 알려진 건 한 자리에서 오래 한 탓이 아닐까요.”                    
- 경영 철학이랄까, 약국 경영의 비결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
“뭐 그런 게 있겠습니까. 하던 대로, 하는 대로 하는 거지요. 한 가지 제가 명심하는 건 저희 집에 오시는 손님이 왜 저희 집에 오시겠습니까. 약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환자만큼 절실하겠습니까. 자상하게 챙겨주는 마음이 이 분들 발걸음을 당기게 한 것이 아닌가 해요. 약이라는 게 사람의 체질이나 병의 증상에 따라 다 효능이 달리 나타나지요. 그러면 이 약을 한번 써보시라고 권하지요, 약국 하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그게 어디 쉽게 마음이 거기까지 잘 안가지요.”              
매장에 들어서면 다른 약국과는 좀 다른 풍경을 본다. 넓은 공간의 벽 어디에도 성경 구절이나 명언 명구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럴듯한 그림도 걸려 있지 않다. 손님들이 접수하거나 진찰하거나 조제된 약을 받는 절차가 마치 컨베이어를 타고 흘러가는 기계처럼 정연하다. 앉는 자리 배치부터 머리를 써서 디귿(ㄷ)자 형이다. 쓰레기 하나 발견하기 어렵다. 심지어 가게 문 앞에 있는 휴지 조각을 사장 자신이 주워 와서 약국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 아침 몇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시는지?
“아침 일곱시 반에 문 열고 여섯시 반에 닫지오”
- 네? 그렇게 일찍요?
“네. 첫차, 둘째 차 타고 읍내로 약 사러 오는 손님 시간에 맞추어 드려야지요. 퇴근도 막차 타고 갈 손님들 편의를 봐 드려야 하고, 뭐 봉사랄 건 없지만 노동 치고는 계속 서서 11시간 일하는 중노동이지요.”
토요일은 오후 3시 까지란다.

단란한 3대 가족

조용한 봉사, 치열한 정의와 평화                     

흔히 말하는 ‘뻘떡거리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랄까.
- 혹 학생운동을 하시거나 민주화나 정의 구현운동을 하셨습니까?
“뭘요. 다만 성당에 나가면서 박종철 사건을 보고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나, 나대로 뭔가 해야 되겠다 해서 나름대로 일을 했지요. 그래 부안농민들의 소몰이 투쟁에도 참여하고 핵폐기장 반대투쟁에도 참여했고 주로 성당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거의 빠지지 안했어요.
- 약국은 어떻게 하고요.
“사람들이 모이면 약국은 더 잘 될 때도 있어요. 거기에서 남는 돈을 몽땅 성금으로 내기도 하고……”
- 핵폐기장 반대 투쟁에 쏟은 민중의 열정으로 몇 몇 뜻 있는 분들이 ‘부안독립신문’을 만들 때 큰돈을 내셨다던데?
“많은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쏟았지요. 제가 특별히 많이 내지는 않았어요.”
- 더군다나 돈도 돈이거니와 당신이 사는 집과 약국이 있는 건물의 한층 전부를 신문사 사무실로 제공한 건 돈을 내는 것과는 그 정성이 크게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세운 집인데, 당신 인생의 전부, 영혼이 깃든 집인데……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한 건 아니고. 사실 그보다 조금 전 한겨레신문 창간할 때도 500만원 1,000주를 기부 했어요. 서울에서 정말 신문다운 신문을 만든다는 데도 돈을 냈는데 우리 고장에서 우리 고장을 위해 신문다운 신문을 만든다는 데 일할 수 있는 토대는 만들어 드려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 거지요.”
말하는 어조가 아주 담담하다.

한약제 약장 앞에서

철근콘크리트 270평 3층 건물 가운데 낸 아래층이 약국이오. 2층이 두 부부의 살림집 겸 약품 창고, 3층이 부안독립신문이 쓰고 있다. 창간 이후 1여 년 이상 무상임대라고 한다.
- 부안에서는 유달리 여러 운동을 다른 지역보다 치열하게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중심 고리 역할을 해 왔다고들 말합니다.
“과분한 말이지요. 제가 그런 ‘째비’(인물 자질)가 못 됩니다. 약국을 제대로 경영하는 일만도 벅찬데. 그저 그쪽 일도 중요하니 관심을 가지고 뒤에서 형편이 되는대로 참여도 하고 적지만 도울 일 있으면 도와도 드리고……”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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