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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이전 부안의 동학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08.2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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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대접주 김낙철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부안의 최초 동학인은 윤상오로 1881년 이전에 입도한 뒤, 해월 최시형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가까이 지내며 호남 우도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윤상오의 활동은 1891년 이후 드러나지 않아 아쉬움을 갖게 한다.
윤상오의 뒤를 이어 입도한 후 부안의 동학을 책임지고 이끈 인물 중 김낙철(金洛喆) 형제가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활동한 김영조(金永祚. 부안 접주로 1893년 2월에 개최된 광화문복합상소 참여)와 김석윤(金錫允, 1893년 3월 보은집회와 2차 봉기 참여)이 있고, 1893년 3월 21일자 『홍재일기』에 기록된 박문숙(朴文璹) 등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부안의 동학은 김낙철과 동생 김낙봉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경인년(庚寅年, 1890) 6월 7일에 동생 낙봉(洛葑)과 함께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6월 17일에 동생 낙주(洛柱)가 종제(從弟)인 낙정(洛貞)․낙용(洛庸)과 함께 입교(入敎)한 뒤에 7월부터 점차로 포덕(布德)을 해서 신묘년(辛卯年, 1891) 3월에 이르러 도인이 몇 천 명이 되었다.”거나 “임진년(1892)과 계사년(1893) 사이에 포교를 하여 신도수가 몇 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숫자 등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김낙철 형제의 입도와 포교로 부안의 동학이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안 동학의 성장은 1892년 2월 서울 광화문복합상소(光化門伏閤上疏)는 물론 동년 3월에 개최된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 원평집회 참석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1892년 10월과 11월에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冤․사면복권)과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금지해 줄 것을 청하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취회에 부안의 동학교도가 참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80년대 들어 교단의 정비와 함께 포교에 나선 동학은 1890년대 들어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것은 정부와 지역의 토호세력에게서 받는 탄압과 수탈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동학교도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계속해서 탄압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교조신원을 통해 공인을 받아 공개적으로 활동할 할 것인가라는 가르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1892년 10월과 11월 있었던 공주와 삼례취회(聚會)였고, 교조신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침탈은 금지하겠다는 충청 감사와 전라 감사의 약속을 받았다. 이에 고무된 동학교단은 이듬해 좀 더 구체적인 신원운동을 감행하였는데, 바로 광화문복합상소와 보은취회와 금구 원평취회이다.  

김낙철이 참여한 보은집회가 열렸던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부안 동학교도의 광화문복합상소 참여는 “1893년 2월, 대선생주(大先生主․최제우)의 신원을 하러 동생 낙봉이 김영조와 교도 몇 백 명과 함께 서울에 갔으나 대선생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낙철의 동생 김낙봉과 부안접주 김영조 등 수백 명이 참여한 것이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이 상소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안에서 수백 명이 참여할 정도로 일정한 교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김낙철은 전라도 도도집(都都執․都執綱)을 맡고 있었다.
광화문복삽상소 후 곧바로 개최된 보은집회에 참석한 인물 부안의 주요 인물은 김석윤(金錫允)과 김낙철이었다. 보은집회의 주된 내용 중의 하나는 척왜양(斥倭洋)이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개최된 금구 원평집회에 참석한 인물은 확인되지 않지만, 부안의 동학인 박문숙이 참여한 뒤 돌아와 전한 이야기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즉 “동학인 3천여 명이 금구 원평에 모여 진을 이루었는데, 진법은 궁을진(弓乙陣)이고, 창의(倡義)라는 깃발을 내걸었는데, ‘충의지사(忠義志士)에게 물어서 일을 도모하여 왜양(倭洋)을 쓸어버리자.’고 쓰여 있었으며, 다음 달 2일에 8로[도]에서 행군하여 합세한 후 왜양을 축출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교조신원이라는 종교운동이 척왜양이라는 정치투쟁 또는 민족자주화를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낙철 역사. 붉은 선 안은 [경인년(庚寅年, 1890) 6월 7일에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이상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부안의 동학은 김낙철 형제 등이 입도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1892년 종교운동으로 진행된 공주와 삼례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1893년에 있었던 광화문복합상소와 보은집회 그리고 금구 원평집회에 참여함으로써 민족자주화를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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