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를 출옥하는 독립투사를 환영하는 군중의 열광 (경향신문 자료)

모깃불
우리 집 대문 밖은 바로 동네 마을회관이었다. 여기에 일본군 속사포 부대 30여 명이 들어와 주둔해 있고 동청에도 역시 30여명의 다른 부대들의 막사였다. 이곳 서해안 부안의 갯가 마을들은 벌집처럼 여기 저기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다. 우리 초등학교는 미군의 서해안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남쪽으로 급히 이동해온 관동군의 대대 본부였다. 관동군은 조선 반도에서 최후 결전을 하기 위한 호조(護朝) 호선(護鮮)의 2개 사단을 증강개편, 이리농림과 정읍농업에 각기 사단 본부를 두었다. 이들의 관할은 인천에서 목포에 이르는 200마일의 연안 전부에 미쳤다고 한다.
4월 1일 새 학기가 개학 하자마자 막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간 우리는 학교를  군인들에게 징발당하여 하서 마전리 안쪽 운암마을 회관에서 두어 시간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일본 군인들은 노계동 뒤로 흐르는 금광원 뚝에서 수조리 쪽으로 가는 수양산 끝자락 지하 참호 속에 진지를 만들었다. 바퀴가 우리 꼬마들 키보다 큰 군용 손 구루마(달구지)에 속사포를 싣고 가는 것을 뚝 에서 보았다. 다부지게 생긴 군인이 황소처럼 맬 빵을 목에 걸고 두 사람의 군인이 뒤를 밀어주며 서서히 2 미터 남짓 좁은 다리를 건넜다. 속사포와 중기관총 두 개를 참호 속에 감추기 위한 지하 벙커를 만드는데 일본군은 몇 달이 걸렸다. 등용리 남쪽 사기봉에는 고사포 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지내고 보면 쓸데없는 헛짓들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그 속사포 부대에서 제일 무섭게 생겼으면서도 유달리 상냥한 ‘곤도오 소오쬬’(近藤,지금 상사 격) 에게 “어디까지 나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으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와싱똥’에 있는 ‘루스베루또’ 대가리까지는 못 미치지만 오끼나와에서 고군산으로 해서 이 변산을 덮치려는 아메리까 새끼들을 끽 소리 못하게 박살 낼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군인들이 동네 한복판에 주둔해있어도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로 알았다. 공출이다 뭐다 들볶더니 징용, 징병으로 끌어간 데다 이기고 있다는 학교선생이나 순사나 면서기의 말과는 달리 별아 별 흉한 소문이 다 떠돌던 참이어서 난리가 바로 여기 우리 부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동네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실상 그들 군인들의 말 상대는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또래 애들 너 댓 뿐이었다.
이러한 군인들과 동네사람들 사이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한여름 모기는 득실거리는데 일본 군인들은 보릿대와 잡초를 태우는 모깃불을 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분고분 듣지 않았다 “지금 이 난리 속에 모기한테까지 피를 빨리라는  말이어!” 생리적인 반항이었다.
어느새 이런 하찮은 일이 묘한 반항 분위기를 자아냈다.
“왜 하필 우리 동네에 와서 지랄이어!”이렇게 수군거렸다. 일본 군인들로 보면 모깃불 연기는 맡을 수 없다는 순전히 생리적인 불만인데 비해 동네 사람들은 왜 느닷없이 군인들이 밀어닥쳐 내 집에 모깃불 놓는 것까지 시비냐는 감정적인 불만이었다. 우리 꼬마들은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주는‘군인들의 고마움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이 잘못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느새 우리는 내 집, 내 마을 보다는 ‘내 나라’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 나라’는 두말 할 것 없이 일본, 즉‘대일본제국’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황국신민의 선서’를 해온 터다. 6.25 이후 20여 년 동안 외어 대던 ‘우리의 맹세’같은 투의‘집단 최면’에 걸려 있었다.  우리는 분명히 ‘황국 소년’이 되어 있었다. 우리 꼬마들이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를 강탈한 압제자의 편이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군인 높은 사람이 마을 회관에 동네 사람들을 모았다.
“한 가지 부락민에게 주의를 주고자 한다. 최근 적기(미국 B29 폭격기) 의 공습이 잦아지고 적 잠수함의 출몰이 특별히 경계되는 이 비상시국에 모기를 쫓는다는 구실로 모기 불을 피우는 행위는 아메리까 스파이의 소행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몰지각한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육군 형법의 소정 규정에 따라 총살에 처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뜻이었던 듯하다.
다른 말들은 전혀 모르지만 둘째손가락을 자기 목에다 대고 ‘빵! 빵!’하는 시늉을 보고서는 ‘총살’시키는 것으로 금방 알아 차렸다. 이런 엄포는 일본 말을 전혀 모르는 동네 아낙네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부터 모깃불은 없어졌다. 스파이가 뭣인지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어떻든 스파이가 도깨비같이 생겼든 귀신같이 생겼든 간에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스파이로 몰려 총살 당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우리는 군인이 주둔한 서 너 달 동안 동네에서 많은 군인들과 인사를 하고 지냈다. 그냥 ⌜군인 아저씨!⌟라고 하지 않고 고마이상 이니 곤도상이니 가네무라상 이니 하는 성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는 쉽게 알아 낼 수 있었다. 열에 두셋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한국 사람으로서 군도를 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같은 일등병이라도 일본 본토 출신들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말도 잘 붙여 주고 주먹밥도 주고 쎈베이도 던져 주는데 이쪽 한국 출신들은 어쩐지 딱딱하고 어딘가 근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집어 삼켰다거나 못살게 굴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백련리 노계동 큰 길에서 본 수양산의 속사포 진지 (동그라미 친 부분) ⓒ장정숙

‘평란이어 평란!’
그 날 따라 무척 더웠다. 맨발로는 땅을 딛기 어려웠다. ‘조리’(볏짚으로 엮은 일본 짚신)에 물을 적셔야만 몇 걸음이라도 걸었다. 우리는 ‘새원장’논 가운데 있는 ‘빨래 둠벙’에서 몸을 담그고 있다가 ‘아랫들’원두막에서 참외를 먹으며 탁탁 무릎과 허리를 치며 모기를 쫓고 있었다. 지금은 이 ‘아랫들’에 신재생에너지 단지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우리 동네 노계동.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그 마당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보아도 모깃불이 아니었다. 집에 불이 난 것으로 보였다. 모깃불만 놓아도 총살이라는데 아니 연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원두막에 있던 친구와 함께 단숨에 불길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대검을 꽂은 총을 세 방향으로 서로 넘어지지 않게 세워 놓고  군인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누가 죽었습니까?”
성급하게 큰 소리로 물었다.
“칙쇼 민나 깃데 시마에(개새끼들 한칼에 베어 없애)”
‘곤도’소오쪼오의 ‘일본 칼’이 쭉 뽑혀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뺀 칼을 무릎 앞에 놓았다 우리는 넋을 잃고 뻣뻣하게 서서 만세 소리와 통곡과 일본 도의 서슬을 보았다. “니혼와 마깨따”(일본은 졌다) 그는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우리는 웬 일인지 덩달아 슬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는 학교고 면사무소도 경찰주재소도 라디오가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복의 정경을 이 외딴 바닷가에서 8.15 그날 해 질 무렵 목격했다. 뒤에 들어보니 일본군의 최전방 부대에는 이른바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이 있던 정오 직후 ‘전투중지 명령’이 하달 됐다고 한다.
“평란이여, 평란!”
그 이튿날 아침. 철조망은커녕 울타리도 없는 병영의 국기 게양대 앞에 선 보초 총 끝에는 어제까지 보지 못하던 대검이 꽂혀 있었다. 그렇게 상냥하던 군인들의 눈 가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어느 새 군인들은 속사포 진지 구축 작업이 아니라 목재며 시멘트며 각종 자재들을 챙기는 작업을 서둘렀다.
동네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논 일은 어지간히 끝나 한숨 돌릴 때여서 장정들은 집안에서 그저 누워 있기 예사였다. 하지만 목화밭이나 고구마 깨 농사는 아직도 풀이 극성이어서 아낙네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뙤약볕에 시달렸다. 고샅은 한적했다. 이런 이상스럽게 조용한 동네 이 집 저 집을 바쁘게 들랑거리며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이 할매 하나씨들은 옛날 임금님 시절에 태어난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해방의 감격, 전남의 한 지방, 8월 말 쯤 (경향신문 자료)

“평란이어! 평란! 난리가 끝났단 말이네, 왜놈들이 안 망허고 어쩌겄어.”
마치 일본이 망하기를 학수고대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좋아들 했다.
“평란이 되었으니  떡을 히먹어야 히여. 술도 당그고……”
며칠 사이에 어떤 집에서는 개떡을 부치고 어떤 집에서는 제사 지낼 누룩을 챙겨 큰 맘 먹고 술을 빚었다. 더 빼앗기지 않으려고 열손가락을 움켜지던 사람들이 갑자기 후해졌다.
“예전부터 말이 있었어. 저 장신포, 월포 앞 ‘는들 바위’가 올라오면 저 충청도 계룡산에 정도령이 나온다고 히였어. 천도가 무심치 않단 말이네. 저 왜놈들이 안 망허고 어쩌겄어.”
며칠이 지났을까, 읍내 갔다 온 사람이 “이것이 우리 조선 깃대래여”하며 흰 백로지에 아무렇게나 그린 깃대 서 너 장을 펴 보였다.
“이것이 먼 깃대여, 조선에 먼 깃대가 있었간디? 우리 종조 하나씨 갓 통에 이런 그림 있었어. 그런디 이상허네 잉, 네 귀에 ‘작대기’(건곤감리)를 기려놓고 말이네.” 이것이 내가 본 태극기의 원형이었다.
나는 월포 사는 6학년 두 형들을 따라 아침 일찍 30리 밖 읍내 길을 나섰다. 서문 밖 삼거리 못 가서 서외리에 있는 어떤 집에 들렀는데 잘 왔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군청 중견 직원이었다.
“이제 조선은 ‘해방’되었다. 일본 놈들은 일본으로 쫓겨 간다. 조선은 곧 ‘독립’이 된다. 만주에 들어온 로시아 군대가 벌써 평양에 들어왔고 얼마 뒤에는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 선발대가 군산 인천으로 상륙한다고 한다. 만주에서 일본 놈과 싸운 ‘김일성 장군’이 곧 경성(일제 강점하에서 서울을 이렇게 불렀다) 에 입성한다고 하더라”
해방, 독립, 김일성…… 그런 말들은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말한  ‘평란’이나 ‘정도령’은 좋아 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 뜻은 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졌으면 우리 조선이 진거나 마찬가지지 해방은 왜 해방이며 더구나 독립한다는 말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우리나라를 일본이 언제 어떻게 집어 삼켰는지는 백지였다. 만주에서 일본 놈을 괴롭혔다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신출귀몰하는 악당으로 알았지 이렇듯 영웅으로는 보지 않았다. 이승만, 김구 같은 이름은 해방 된지 한 달도 더 지나 학교에 가서야 ‘독립운동자’로 알았다.

관동군 대대본부가 있던 상서 초등 교사. 앞줄 가운데는 1946년 6학년 담임 조상훈 선생. (김진배 제공)

‘쪽발이’
개학이 된 것은 전국 일제히 9월 24일이었다. 일본사람 교장과 선생이 떠난 자리에 전원 조선 사람으로 채웠다. 전부터 있던 선생은 겨우 넷, 나머지 여덟을 급히 채워 웬만하면 ‘선생님’이 되었다.
그 며칠 뒤에 새로 교장선생이 부임 해 오셨다. 평교 학교 (백산초등)에 계셨다는 박기환 선생이다. 교장 선생이 단상에 올랐다. 사회를 보던 선임교사는 ‘고쪼선생,’‘고쪼선생’하며 머뭇거렸다. ‘고쪼’는 교장이라는 일본 말이고 선생은 그대로 우리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엉겁결에 “고쪼 선생 개이레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통했다. 모두들 오랜 습관대로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뒤 우선 구령부터 군청에서 통지가 왔다. 군청에는 한 사람의 학교비 직원과 ‘시학’이라는 요즘의 장학사가 관장했다. ‘기착’, ‘앞으로 나라베!’, ‘바로!’, ‘휴!’해도 학생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한글로 쓰니까 우리 조선말로 보이지만  실상은 ‘앞으로’와 ‘바로’만  우리말이지 나머지는 모두 일본 군대의 구령을 그대로 한글로 옮겼을 뿐이었다. 기착은 ‘기오 쓰께’(氣着)를 직역한 것이오, ‘나라베’는 나란이를 뜻하는 병(並)을 그대로 쓴 것이오, 휴는 쉬라는 뜻의 야스매(休)다. 처음 듣는 말 인데다 구령치고는 어쩐지 매가리가 없는 것 같았다.
이 무렵이었다. 일제 말기 흔히 보던 국민복을 입은 40대의 허름한 중년 신사가 자전거를 끌고 우리 상서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모리 야마(森山初次) 교장이다!”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이 소리 쳤다. 그는 상자에 짐을 잔뜩 실은 자전거를 바쳐놓고 일본 조상신을 모신 ‘호안댕’(奉安殿)을 향해 전에 하던 식대로 참배를 했다. 어떤 아이는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고 어떤 아이는 한두 달 전에 하던 대로 일본말로 “교장선생님 오랜만입니다!”하며 스스럼없이 인사했다.
“아, 우리 상서 아이들은 아주 예의 바르구나!”그는 새삼 감탄하듯이 아이들의 까까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단단한 나무 상자에서 연필 한 다스와 심을 갈아 끼우는 샤프 연필, 크레용과 크레파스 같은 학용품을 번갈아 손에 쥐고서 장사꾼처럼 천천히 소리쳤다.
“연필 한 다스 달걀 한줄, 샤프 펜 두 자루도 달걀 한줄 입니다. 크레용도 달걀 한줄, 크레파스는 조금 비쌉니다. 달걀 두 줄! 돈으로도 받습니다.”
“지금 돈 없으면 내일 가져 와도 좋아요.”
수염이 더부룩한데다 눈언저리는  푹 꺼져 있었다. 자전거 뒷바퀴는 펑크가 났는지 새끼줄로 칭칭 감겨 있었다. 너도 나도 20여명의 학생들이 각기 원하는 학용품을 예약했다. 교장선생은 잡기장(노트를 흔히 이렇게 불렀다.)을 꺼내 주문한 학생의 성을 불러 주는 대로 또박 또박 적었다. 나는 언제부터 샤프 펜과 크레파스를 갖고 싶은 터라 잘 됐다 싶어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웅성웅성 몰려들자 모리야마 교장은 신이 났는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고레 쥬니혼, 다마고 쥿꼬”(이것 열두 자루, 달걀 10개)
읍내 장터에서나 듣던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자 양지 바른 교실 벽에 기대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6학년 상급반 아이들 너 댓이 두 손을 입 앞에 모우고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쪽발이! 모리야마 쪽발이!”
교장은 황급히 자전거를 교문 쪽으로 돌렸다. 교문 밖으로 나가서야 ‘호안댕’에 참배했다. 그 이튿날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교장은 외상값을 받으러 왔다. 많은 학생들이 달걀을 들고 왔다. 하지만 몇몇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서서히 가던 세상의 변화는 며칠 사이에 급히 돌아갔다. 왜놈, 이른바 ‘쪽발이’의 사당 ‘호안댕’을 쳐부수는 일이 벌어졌다. ‘호안댕’은 가로 세로 2미터 남짓에 높이 2미터쯤 되는 조그만 구조물로서 정면 한 가운데에 쌍창문이 달렸다. 그 안에 가로 선반을 지르고 보자기에 싼 조그만 신주가 모셔 있다.     
대형 쇠망치 몇 개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쳐대자 시멘트는 금방 쩍쩍 금이 갔다. 안에는 철근이 아니라 목조였다. 곡괭이와 삽으로 바닥을 긁어내니 이건 뭔가! 여러 마리의 뱀이 엉켜 기어 나오며 꿈틀거렸다. 아침저녁으로 경배의 대상이던 일본 신화 속의 우상 ‘아마데라스오우미까미’(天照大神)는 이렇게 사라졌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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