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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맺으리라"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08.0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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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이 방문한 김영조의 집이 있던 옹정(瓮井. 부안읍 옹중리 상리) 입구

부안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코 백산대회이다. 더욱이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이라는 간결한 문구는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림과 동시에 부안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한다.
그러나 부안에는 백산대회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맺으리라.(開花於扶安 結實於扶安)”는 해월 최시형의 법설(法說․예언)이다.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동학의 꿈과 이상이 부안에서 시작되고, 그 결실을 부안에서 맺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해월이 특정지역을 지목해서 언급한 장소는 부안이 유일한데, 그만큼 부안지역에 대한 기대가 컸음을 뜻한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동학교도가 부안을 질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880년대 들어서면서 교단의 정비와 함께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에 나선 해월은 전국의 각지를 순회하면서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해월이 부안을 방문한 것은 1891년 5월이었다. 호남 우도의 두령(책임자)을 맡고 있던 윤상오의 신리 집과 부안 접주를 맡고 있던 김영조(金永祚)의 웅정에 있는 집에 들린 것이다. 한편, 해월이 부안을 방문하기 전인 1890년 6월, 부안의 김낙철․김낙봉 형제가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들의 포교로 부안의 동학교도가 몰라보게 늘어나고 있었다.

『김낙철역사』에 기록된 開花於扶安 結實於扶安

해월이 부안에 머무른 기간과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맺으리라’는 법설을 남긴 것으로 보아 부안에서의 일정은 해월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말을 남긴 장소는 부안이 아니었다. 금구 대접주 김덕명(金德明)의 집이라는 설과 태인 동곡에 있는 김낙삼(金洛三)의 집이라는 설이 함께 전한다. 이것으로 보아 해월이 부안을 떠난 뒤에 한 말이 되는데, 그것은 해월이 부안의 동학교도에게 듣기 좋은 말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해월을 부안에서 무엇을 보고 이러한 법설을 남겼을까?
이 시기 부안의 동학에 대해서 『홍재일기鴻齋日記』는 “동학설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덧붙여 “향론(鄕論)이 크게 일어나 향교의 청금안(靑衿案)에 있는 동학인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훈집(訓執)도 이름을 삭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의 교세가 급격히 확산되었고, 이에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동학을 경계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으며, 부안향교에서는 유생(儒生)으로 등록된 자들 중에서 동학에 입도한 이들을 제명시켰으며, 각 면에 1명씩 배치되어 부안현에서 실시하는 호구(戶口)와 당해년도 토지(土地) 상황을 조사할 때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한 훈집도 아예 제명을 시켰다는 것이다. 동학교도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나 수탈은 아닐지라도 지역에서 기득권을 가진 세력으로 분류되는 유생이나 행정을 보좌하던 훈집 등이 동학에 입도할 경우에는 아예 제명시키는 압박과 탄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해 1892년부터 동학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거세어졌다. 『홍재일기鴻齋日記』 7월 19일 자는 “근일(近日)에 관가에서 동학인을 대대적으로 다스리고 속전(贖錢)으로 300냥을 받았다고 한다.”고 하였으며, 8월 11일에는 “향교에서 동학인을 적발하라는 회문(回文)이 왔다.”고 기록하였다. 즉 관아에서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이때 붙잡은 동학교도를 죄 값으로 300냥을 받은 뒤에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향교에서는 동학교도를 적발하여 처벌할 것을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김낙봉이력』에 기록된 開花於扶安 結實於扶安

이로보아 해월이 부안을 방문한 1891년 이후 부안에서는 동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교세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이와 같은 동학의 교세 확산에 대해서 정부 차원이던, 부안현 차원이던 적발과 처벌이 있었고, 향교에서는 유생으로 등록된 동학인을 제명시키는 등 지속적인 탄압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부안에서의 동학은 확산되었다. 그리고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이 본격화되고, 일본과 서양세력을 반대하는 척왜양(斥倭洋) 민족자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즉 1893년 서울 광화문복합상소(光化門伏閤上疏)와 충청도 보은집회, 그리고 전라도 금구집회 에 부안의 동학인들이 참여한 것이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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