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김화래 화백

춘설헌에 피어난 오죽

의제 허백련이 손자처럼 아낀 제자
혁명가의 피는 붓 끝에 칼이 되어

그림은 그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생동해야 한다. 그림이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1990년 7월 전주 예술회관에서 10여 년 동안의 작품을 모아 열 번째 전시를 할 때 주인공 화가 김화래는 이렇게 당돌하게 말했다. 320호 짜리 초대형 60점 등 75점이 선보였다. ‘대바람 소리’ ‘춤추는 구름’ ‘백로와 연꽃’은 백미였다. 그림은 우선 크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정력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1970년, 47세의 김화백은 이미 원숙한 경지에 들어선 지 오래다. 여러 번의 입선에 특선, 거기에다 국전심사 위원을 맡았다. 화가로서의 뛰어난 예술성보다 아무개의 손녀로 더 알려지던 화가는 뒤늦게야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율곡을 나았던 강릉 오죽헌을 연상케 하는 오죽烏竹이라는 호까지도.
 

‘풍죽’1989. 560 X 70 작가 소장. 8폭 병풍

벽 한쪽을 온통 그리고 다닌 애기

화래는 일찍부터 범상치 않았다. ‘기집애’는 백로지로 새로 도배한 벽에 뭔가를 열심히 그렸다. 옆으로 죽 긋기도 하고 위 아래로 찍기도 했다. 며칠 사이에 하얀 벽은 어린 애 장난으로 더럽혀졌다. 할매는 안타까워 혀를 찼다.
“먼 기집애가 저런 짓을 할까, 비싼 돈 주고 바른 배람빡(벽)을 저러코 드럽게 맹글어!”
하나씨는 태연했다.
“허허, 매칠 좀 놓아두고 보세. 무얼 그린다고 저러는 거신지.”
며칠 지나자 마치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받은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서도 그리고 서서도 그렸다. 할머니는 기가 차서 할아버지 표정을 넌지시 흘겨보았다.
“저게 멀 한다고 저렇게 끄적거리는 지 더 두고 보자니께. 영 보기 사나우면 벽 아래 쪽만 다시 도배하면 되는 것이고.”                     
할아버지는 댓 살 손녀딸이 하는 거동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인터뷰를 요청한 필자가 우선 궁금한 것이 수십년 동안 전설처럼 전해온 ‘벽화의 진실’이었다.
-그게 몇 살 때였습니까.
“모르지. 어떻든 초등학교 가기 훨씬 전이니까요.”
-그래 뭘 그렸습니까?                  
“그때 생각이 어렴풋이 나네요. 꽃도 그리고 나비도 그리고 할머니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리고 아, 또 강아지도 그리고 병아리 닭도 그린다고 그린 건데 그게 그림이겠어요?”
그림으로 생각하고 그렸으면 그림이지 그림이 따로 있을까, 보는 사람이 그림으로 보아주면 그림이 되는 것이지, 누가 피카소가 끄적거린 것을 그림이라 감탄했던가. 누가 의제 허백련이 그린 산수화의 안개를 보며 ‘신필’이라 했던가.
사실 작가 김화래가 태어난 자연과 집, 흙바닥과 바람벽이 바로 화폭이었다.
“우리 집 남쪽 대문을 나서면 강줄기처럼 끝이 없는 뚝 길이 있고 뚝 길 아래엔 사시사철 쉬임없이 짙푸르고 고요히 흐르는 동진강 줄기가 탯줄처럼 뻗어 있었다. 강과 뚝과 들이 앞뒤로 둘러싸인 이런 야지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꽃나무가 많은 집이었다. 나는 어디서 주워온 연필인지는 몰라도 논다는 것이 바람벽에 아니면 땅바닥에라도 무슨 그림인가를 그려야만 했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할아버지 김철수 옹.

김화래는 동진강 건너 동쪽에 있는 화호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를 마친 화래는 할아버지를 따라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있는 의제 허백련 선생의 서실 춘설헌(春雪軒)을 찾아간다. 일제 강점 아래 이들 의제(毅齊)와 지운(遲耘)은 3.1운동 전후 동경 유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지운 김철수는 일제 강점아래서 젊은 날 13년 동안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감옥에 쳐박혔다. 거기에다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관헌의 증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통치에 익숙해진 친지로 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 해방되고 반쪽 정부나마 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감시와 박해는 천형처럼 따라 붙었다. 일제강점 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이루는 길은 실상 항일무장 투쟁을 하거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운동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세였다. 그는 지난날 많은 동지들이 분단된 북으로 갈 때 남쪽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한 발짝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지운 선생은 외로울 때면 산을 찾았고 밤낮 할 것 없이 쪼그리고 앉아 난초를 치고 산수를 그리는 의제를 찾았다.
할아버지의 손녀에 대한 애정은 서울에 까지 뻗혔다. 지운 김철수는 손자 딸이 전주 여고에 들어가자 바로 당대 서예계의 최고 원로라 할 이당 김은호 화백을 찾아 손녀의 지도를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전주와 서울을 오고 가며 선생의 체본을 받아다 손녀딸에게 주었고 손녀딸은 할아버지 편에 자기가 공부한 작품을 드렸다. 확실한 무보수 택배였다.                           

‘여름’1989. 72 X 68 정운상 소장.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쪽에서 더 주목하는 중국 현대 최고 화가 치바이스(1864-1957)의 화풍을 연상케 한다. 2년 전 예술의 전당 전시.

칼끝 같은 문인화

문인화는 한번 긋는 것으로 족하다. 거기에는 덧칠을 허용하지 않는다. 손끝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 깊은 영혼의 번뜩임이 칼끝처럼 종이에 닿는다. 먹의 농도는 번쩍하는 순간에 정해진다. 수백 번 수천 번의 공부를 통해 익히지 않고는 범인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한다.
1974년 4월 초, 때 아닌 눈이 무등산을 온통 덮었다. 광주 시내만 겨우 트였을 뿐 무등산 춘설헌은 길이 꽉 막혔다. 동아일보 기획부장이던 필자는 정보기관의 압박을 피해 뜻하지 않게 이틀 밤을 이 산장에서 보냈다. 며칠 전에 오셨다는 지운 김철수 선생과 또 한 분 내가 모시고 간 어른과 함께 2박3일을 숙식을 같이 했다. 마침 눈이 그치고 햇살이 비쳤다.
“화래야, 이 어른들 곧 가실 텐데 춘설차 이쁘게 대려 줄까.”
선생님 옆에서 수발을 들던 한 아가씨에게 이렇게 일렀다. 필자의 귀가 번쩍 띄었다. ‘춘설차’는 아마 여기서 나오는 차 이름 같은데 차를 ‘이쁘게 대린다’니 듣지 못한 말이었다.
“차 이렇게 이쁘게 대린걸 보니 공부 많이 늘었다.”
의재는 귀가 어두운 지운이 알아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칭찬하는 법도 있구나 싶었었다. 그 아가씨가 지운 김철수 선생의 손녀인줄은 훨씬 뒤에 알았다.  
어느 해 겨울이든가 화래는 겨우 내내 무등산 눈 속에 파묻혀 얼음 같은 차가운 물을 받아 먹을 갈아 난초를 그렸다. ‘고요하고 소리 없이 향기를 내뿜는 그 모습과 청아하고 우아한 모습’에 빠졌다고 한다. 난초 잎은 가냘피 뻗으면서도 힘이 있고 농묵 중에서도 윤기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먹빛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꽃은 어둠이 내리는 하늘빛 담묵이어야 하고 꽃대 또한 마디마디 서려 향기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에 있는 동아대 미술과를 나와 기전여고 교사 시절 오죽 김화래는 이런 섬세한 표현이 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해 한 시간 가르치려면 세 시간 네 시간을 교재 준비를 하고 이를 타이핑 하거나 프린트 했다고 한다. 

묵향 가득한 전주 덕진동 집에서, 왼쪽부터 딸 정혜나, 남편 정순훈, 본인, 아들 정윤상

퉁퉁 부은 오른 손 가운데 손가락      

헤어지는 악수를 하다 말고 김화래 여사는 ‘아얏’하며 깜짝 놀랐다. 50년 잡은 붓자리가 나이 드니 가끔 붓는다고 했다.
-언제 까지 일하실 것 같습니까?
“죽을 때 까지 하지요. 한 밤 중이든 새벽이든 생각나면 붓을 잡아요. 열 시간이고 열다섯 시간이고 피곤하면 그 자리 꼬꾸라져 자고.”
무아의 경지란 이런 것인가, 그의 스승 의재는 60 되기 전에 스스로 의도인(毅道人)이라 불렀다. 희수의 화래(和來)를 ‘오죽선인’(烏竹仙人)으로 부르면 어떨까. 남편 정순훈(鄭淳勳)과의 사이에 1남 1녀. 한화건설 간부인 아들 정윤상은 안양에 살고 있고 딸 정혜나는 우석대 미대를 나온 화가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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