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자유란 구속이 없는 상태로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문자 그대로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로 추구해야할 이상이다. 그런데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모순어법의 제목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이끈다.
프롬은 근대 이후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인간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한다고 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자유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 AI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가’ 라고 질문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인은 전근대적인 사회의 구속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개인의 능력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는 자유를 상실했다고 언급한다. 이를테면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적극적인 자유(~에 대한 자유:freedom to)가 아닌 소극적인 자유(~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예컨대 자유는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그들을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하느냐 자유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프롬은 이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메커니즘에 대해 정신분석과 사회심리학적으로 접근한다. 나치즘의 심리에서는 히틀러가 대중을 “전형적인 사디즘적 방법으로 경멸하면서 ‘사랑’한다고” 연설한다거나 대중을 조각가의 재료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나치즘의 지배 심리를 설명한다. 또한 파시즘의 지도자에 대한 복종은 마조히즘으로 파악한다.
두 심리의 근원적 속성은 고립감이며,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 고립과 무력감으로부터의 도피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비합리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근원적으로는 관계가 밀착되어 있는 개념인데, 일반 대중에게 두 용어는 상반된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나 철학가들은 고립감을 견뎌내지만 일반 대중은 고립감을 두려워하므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존립할 수 있었다.
독일의 나치즘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자유는 도피의 메커니즘에 의해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지 못한다.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에게 스스로 예속되는 형태로, 또는 은폐된 강제성에 의해 순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의 위계논리와도 맞물려 있다.
권위주의 도피 메커니즘에서 프롬은 외적 권위와 내적 권위보다는 공공연하지 않은 익명적 권위가 사회에 더 부정적이며, 도피의 메커니즘 중 ‘자동순응성’이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즉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됨을 버리고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잃기 때문이다. 이때 고독과 불안을 느낄 수 없는 개인은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자아상실이나 도피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상실과 속박을 양산한다. 그렇다면 개인이 고립감을 극복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세계나 타자와 만나는 적극적인 자유는 없는 것일까. 프롬은 자발성에 의해 인간의 동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자기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인은 개인의 자아실현이 가능하도록 자유를 발전시켜오는 동안, 자유가 주는 적극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소극적 자유에 의한 도피심리를 형성했으며, 스스로를 획일화하고 일반화하는 어리석음을 초래했다. 이러한 소극적 자유론을 벗어나 자유가 주는 진정한 적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발성이 중요하다고 말한 데서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적극적인 자유야말로 인간이 거대 경제 체제의 톱니바퀴와 같은 자동인형에서 탈피하여 고립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장마와 폭염처럼 자유와 구속에는 심리적으로 서로를 당기는 인자가 숨어 있다. 구속은 자유를 갈망하게 하고 때로 자유는 구속을 꿈꾸게도 하기 때문이다. 장마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폭염을 달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계곡물에 발 담그고 에리히 프롬의 자유론에 눈길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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