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독립신문이 전진기지 돼라



김지하 시인은 지난 호에서 ‘거대담론의 실종과 붉은 악마의 대안적 측면’을 강조했다. 또 집단주의적 ‘공동체’가 아닌 ‘공생’을 역설했다. 지난 호에 이어 김 시인은 에코-디지털(echo-digital)운동을 강조하며 개체성-융합-분권의 원리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디지털과 유비쿼터스, 철학과 문명사를 넘나드는 현란한 담론으로 좌중을 압도했지만, 그가 시종일관 강조한 것은 ‘이중적인 것의 상호 보완적 관계맺음’이었다. 그것은 곧 부안의 경험을 확장하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편집자주

거대담론이 일단 주어지면 그 위에는 더 많은 작은 담론이 보장됩니다. 개인이 더 많이 존중되는 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문명이라든가 남북통일이라든가 동아시아의 협동이라든가 생명평화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이 유기성을 띄고 좀 더 활발해지면 개인대 개인의 분권적인 자기존중과 보장은 훨씬 더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이런 것이 부안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일입니다.
지역의 작은 시민운동들이 유기적인 토론과 소통을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안반핵운동과 부안독립신문의 창간을 계기로 해서 나타나야 할 일입니다. 전라도만이라도 해야 합니다. 지역자치운동, 지역생명평화운동이 착수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 큰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붉은 악마를 보세요. 10대, 20대 애들이 다 하는데, 여기 교수님들도 계시고 나도 대학 선생인데, 창피한 일입니다.
부안독립신문을 전진기지로 해서 성당과 내소사를 제 안방 드나들듯이 하는 것을 자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편리해서 드나드는 게 아니라, 드나들면서 카톨릭과 불교, 동양과 서양 등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큰 틀의 상호관계를 생각할 때가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일을 벌여놓고 벌인 일에서 자기가 배우는 관계, 이것이 최고의 교육학인 셈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서 배우는 것, 동학의 첫 번째 원리가 ‘스승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안은 저질렀습니다. 이제 자기가 자기를 설명해야 할 때입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 자기가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기도 합니다. 4.19가 났을 때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19살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곧 5.16이 나서 군바리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꼴 보기 싫으니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4월에 했던 게 좀 다른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나온 게 “혁명이다”, 이런 결론을 얻은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데모 좀 하다보니까 이승만이 쫓겨났다”,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솔직한 얘깁니다.
혁명이라고 한 다음부터 민족, 민족문화운동, 판소리, 탈춤, 민요, 풍물을 익혔고 그 다음부터 사회개혁, 민주주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1960년이 4.19였고 61년이 5.16입니다. 63년에 한미행정협정 데모가 있었고 64년에 한일굴욕회담반대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에코-디지털, 부안에서 하자
저는 붉은 악마와 부안문제 둘을 주요하게 연결시켜서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반핵 생명운동으로서의 에코(echo)하고 방콕의 퓨전, 밀실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한 디지털(digital)하고의 연결입니다. 하나는 유기성이며 농촌 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유목이며 도시 중심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에코와 디지털 사이에 가교를 만들어서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안에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부안이 붉은 악마와 인터넷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쌀 개방 반대하는 운동이 쇠파이프 들고 해서는 안되고 몇 명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걸어서 투쟁해봤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럼 농촌은 어떻게 견디며 생태계 오염은 어떻게 정화할 거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 많습니다. 에코-디지털이 부안서부터 붉은 악마에게 편지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단기적으론 부안문제인데 중기적으로는 새만금이란 큰 이슈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론 전남북 전체의 생명과 평화, 자치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안분들께 권유를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세 가지 책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루이스 만포드의 <유럽문명사>입니다. 동양의 음양론을 끌어들여서 유럽의 문명사를 예견한 것입니다. 이른바 ‘역동적 균형론’입니다. 바로 에코-디지털의 문제인데 이것은 앞서 말씀 드린 거대담론과 작은 담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노조와 시장원리 같은 반대되는 것 사이의 ‘상호 이중적 교호결합’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되는 것끼리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는 것이죠. 새로운 역사를 보는 눈을 유럽문명사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또 왕필 주석의 <주역>을 읽으십시오. 마르크스 헤겔주의 변증법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체계는 주역뿐입니다. 한 공산주의자의 말입니다. 또 하나 꼭 권하고 싶은 것은 <동학경전>입니다. 박명수 선생의 자료에 대한 해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부안, 반핵운동의 성지
부안은 반핵운동의 성지입니다. 성지라는 것까지 겸손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핵은 점점 더 위협이 될 것이고 전세계가 핵의 그늘 아래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반핵운동은 치열해지는데 부안처럼 질기고 치열하게 반핵운동 한 역사가 별로 없습니다. 한 지역에서, 특히나 촌(村)에서, 용서하신다면 게다가 촌놈들이 말입니다.
유럽의 경우 지식인중의 지식인, 진보중의 진보가 녹색이며 생태주의인데, 녹색당이나 하는 반핵을 무지랭이 촌놈들이 했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 어떻게 부안이 성지가 아니겠습니까. 성지로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해야 합니다.
부안독립신문이 공부를 위한 텍스트로 나서야 합니다. 우선, 핵 없이 사는 방법은 없나. 둘째, 핵을 대체할 대체에너지는 나올 수 없는가. 이를테면 메탄올처럼 밭에서 재배하는 에너지는 있을 수 없는가에 대해 토론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이들에게 에너지 문제의 모순과 현대 문명이 가진 질병이 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육이 가진 거대한 맹점을 부안부터 모범적 교육방안에 대한 커리큘럼을 짜고 불을 질러서 아이들과 학부모를 전국적인 교육혁명의 주체로서 들어 올릴 수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제일 심각한 문제는 반핵이 아니라 교육문제입니다. 교육 안에 생명과 반핵문제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분석, 종합, 토의, 합의, 공표, 주장, 항의, 시위, 공청과정, 공개적 합의과정, 그 아젠다로서의 축약과정 전체를 통 털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학부모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생명민주주의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한 개인의 민주주의적 정치 능력을 어려서부터 키워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모임도 주목해야 할 조직입니다. 계는 곧 호혜입니다. 각자가 개인 몫을 얻기 위해 들게 되는 것이 계입니다. 자기 목적이 있는 개체성, 즉 아이덴티티인 셈입니다. 하지만 형제지간과도 같은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곧 융합, 즉 퓨전인 셈입니다. 계주 역시 돌아가며 합니다. 곧 분권입니다. 계 안에 자기조직화 진화론의 최첨단 논리인 ‘내부공생이론’이 숨어있습니다. 겉은 개체이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공생하는 원리입니다. 곧 개체를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붉은 악마 현상조차 사회학자중 한 명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을 통해 가능하면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의 대개벽, 즉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여기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부안독립당’이 문화정권을 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성당과 내소사, 부안 현장의 투쟁에서의 깨달음을 서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부안사회의 현재 움직임을 통해서, 또 거기에 대응하는 현 정부의 실체를 통해서, 외부의 핵 간섭을 통해서 현실적인 것들을 세워가야 합니다. 부안독립신문 첫 호를 다섯 번이나 읽었습니다. 좋은 게 더 많지만 (웃음) 쓸데없는 소리도 많습니다. 중앙언론에서 작은 토픽 다루듯 하는 그런 기사는 쓸데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신 자질구레하더라도 지역사람의 정겨운 얘기를 싣는 것이 곧 심장의 박동수를 크게 뛰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고리, 영광을 다루고 체르노빌, 드리마일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립되지 않도록 교류해야
장소는 곧 의견입니다. 성당에서 집회를 하면 성당이 곧 의견입니다. 민족전선인 신간회의 역사를 보면 천도교의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신간회는 천도교 젊은 남성과 여성들의 10년에 걸친 적극적 헌신이 일궈낸 성과입니다. 신간회 결정내용 가운데 동학의 정치논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에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린다는 제3의 방향이 스며든 것입니다. 누가 요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기 참석하신 분들도 잠재적인 동학당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동서 통합의 동학이어야 합니다. 제 잘났다고 까부는 동학당은 망하기 십상입니다. 카톨릭과 불교는 아직도 큰 종교입니다. 그쪽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도교를 배워야 합니다.
또 빈곤 극복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발적 가난은 요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을 어느 선까지 절제하지 않으면 지구 생태계의 오염, 멸종, 자정의 한계를 막을 수 없고 핵을 더더욱 막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전기를 쓰기 위해 핵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조금만 절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모델이 부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전기 줄이고 촛불 켜고 있는 것, 이거 서울사람들 못합니다. 자발적 가난이 화두입니다. 욕망을 자제해야 합니다. 모든 생긴 것은 없어지기 마련이고 지구 역시 마찬가지이겠지만 지금 없어지는 것은 인간의 잘못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안분들께 제발 부탁합니다. 부안과 붉은 악마가 호형호제하는 걸 보면 좋겠습니다. 부안이 붉은 악마를 가르치든 그들에게 배우든 손잡지 않으면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방법론을 배우고 교류해야 합니다.

정리 문병원 편집국장 moonbw@ibuan.com
사진 염기동 기자 yumkd@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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