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은 부안의 대접주였던 김낙철(金洛喆)이다. 동학의 부안 포교는 물론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동학의 재건 활동을 비롯하여 천도교 활동까지 전 시기를 함께 한 인물이다. 특히 김낙철을 부안의 첫 번째 동학인으로 소개하는 게 일반화되어 있는데, 이참에 부안의 첫 번째 동학인이 누군가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안을 연고로 하는 첫 번째 동학인은 윤상오((尹相五)이다. 그에 관한 최초 기록은 1881년에 나온다. 즉 1881년 8월에 유경순(柳敬順)․김영식(金榮植)․김은경(金殷卿)․김성지(金成之) 등과 함께 신사[神師․해월 최시형]를 뵙고 수도의 절차를 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상오는 1881년 이전에 동학을 접하고 입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해월이 1883년 충청도 공주에서, 동학의 경전(經典) 중의 하나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는데 유사(有司)로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해월이 충청도 공주 신평리(薪坪里)로 이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집 주인이 윤상오였다.
이상으로 윤상오는 1881년 이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동경대전』의 간행에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로 참여하였으며, 잠행(潛行)하며 포고하던 해월이 머무를 집을 제공하는 등 교단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김낙철 형제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90년 6월이었다. 그런데 바로 한 달이 지난 7월 29일자 『홍재일기鴻齋日記』에는 “동학설이 크게 일어났다.(東學之說大起)”고 기록되어 있다. 김낙철 형제가 동학에 입도한 뒤 한 달 만에, 이처럼 부안에서 동학이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윤상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윤상오와 부안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드물다. 1891년 7월경, 해월 최시형이 부안 신리(新里. 현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윤상오의 소실(小室) 집을 방문하였고, 다음날 부안 접주로 옹정(瓮井. 부안읍 옹중리 상리)에 사는 김영조의 집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그때 윤상오가 호남 우도(右道)의 두령이었다고 한다. 즉 윤상오는 호남 우도지역의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다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윤상오의 신분이다. 윤상오에게 소실이 있었다는 것은, 윤상오가 재력을 갖춘 양반이거나 양반이 아니더라도 재력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윤상오와 신리와의 관계이다. 윤상오의 소실이 사는 집을 윤상오의 집으로 본다면, 윤상오가 신리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윤상오가 호남 우도의 두령이었다는 점으로 확인된다.
이상으로 윤상오는 해월을 만나 동학의 수도 절차 등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였고, 해월이 잠행하며 포교에 힘쓸 때에는 해월이 머무를 거처를 제공하였으며, 해월이 부안을 방문했을 때에는 자신의 소실 집에 머무르게 하는 등 해월은 물론 동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더욱이 윤상오가 호남 우도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은 동학교단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윤상오의 집이 공주에도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윤상오의 활동 무대는 호남과 충청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윤상오의 활동은 김낙철 형제가 동학에 입도하던 1890년보다 9년이 앞선 것으로, 동학의 부안 포교 역시 이보다 앞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1891년에 해월 최시형이 부안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김낙철의 입도 이후 포교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영향도 크지만, 일찍이 윤상오가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함으로써 동학이 확산될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동학교단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던 윤상오의 행적이 1891년 이후 나타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호남을 우도와 좌도 나누어 관할하던 것을 하나로 묶는 호남좌우도편의장(湖南左右道便義長) 임명에서 탈락한 이후이다. 이때를 전후로 하여 동학과 거리를 두었거나 활동을 접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진면 내기리 신리 마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 신리 마을은 부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4㎞ 정도 떨어져 있다. 내기리는 배개재․신흥․신리․상리 등 4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 있는데, 일본강점기였던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상동면(上東面)의 소재지가 있을 정도로 제법 규모를 갖춘 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신리 마을 앞쪽에는 고마제(雇馬堤)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가 조성되는 1958년 이전에는 윤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으로 안터라 불리었다고 한다. 뒤쪽으로는 내기평야(內基平野)의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옛적에는 파평 윤씨들이 많이 살았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고 한다. 신리 건너편 신흥 마을에는 윤씨의 선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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