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을 바라보는 나이에 팽팽한 모습의 최국서 사장 ⓒ장정숙

“백합에 인생 건 40년”

계화도 아가씨의 솜씨가 88올림픽으로 대박

한창 경기가 좋았을 때는 주말이면 하루에도 2백 명, 3백 명의 손님이  몰려드는 ‘백합죽집’인데도 그 주인의 이름은커녕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계화식당, 계회관이면 그만이다. 사람보다 옥호였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삼성이나 현대가 주인이 할애비든 손자든 관계없이 상호가 ‘삼성’, ‘현대’ 그것도 영문 표기라야 폼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슨 재주가 있어서 불알 두 쪽만 차고 내려온 피난민이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을까.

반바지 입고 오라잇!

밀짚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검정 반바지를 입은 건정한 남자가 교통 신호용 경봉 끝을 아래쪽을 가리키며 ‘올라잇!’ 주차할 곳을 지시한다. 호루라기를 불며 경봉 끝을 치켜세운다. 그러면서도 맨발에 슬리퍼다. 런닝 없는 연분홍 셔츠를 걸쳤는데도 잘 어울린다. 야하지 않으면서 칙칙하지 않다. 하지만 주말이면 깔끔하게 모시 바지저고리의 한복으로 교통 정리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한동안 물끄러미 그 민첩한 정경을 바라보았다. 신들린 사람이랄까, 연극배우랄까, 저 사람이 전직 교통경찰이었나, 퇴역한 모범기사일까.

- 이런 주차관리 한지 얼마나 되십니까?
“글쎄요, 한 10년 되나, 그건 왜”
- 하도 능숙해서요.
“이게 내 밥벌이야, 내 몫을 해야 밥 얻어먹지.”
- 사장님 회사 아닙니까, 시장에 나가 재료를 사온다거나 종업원들 감독을 한다거나 손님들 좌석을 안내 한다든가 다른 일도 많은데…… 뙤약볕에 주차관리를 하다니!
“그러지 않아도 옛날 친구들이 내게 말해요, 너 이제 돈 벌만큼 벌지 안했나. 인제 사장 폼도 잡으라고 말이지. 나 그 친구들에게 말한다. 사장이 뭐 하는기 고, 돈 버는 기 아이가. 땀 뻘뻘 흘리면서 라무니 수십리 수백리 백합죽 한 사발 먹으러 왔는데 차댈 데도 없으면 어떠카겄어.”
남쪽에 내려와서 69년을 살았는데도 급해지니 황해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 나온다. 그러지 않아도 귀가 어두운 필자가 ‘천천히 말씀해주세요’하자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다. “내 말이 좀 빨라?”

밥값을 해야 한다며 주차 안내를 하다 잠간 쉬는 최사장

인터넷 시대의 영업

주차 관리에 나서게 된 연유는 이렇다. 이 집을 찾는 사람은 부안사람이나 전주, 익산, 군산 같은 전북 사람만이 아니다. 서울에서도 오고 대구, 부산에서도 온다. 황해도나 평안도, 함경도 도민회 사람도 온다. 그 사람들이 불원천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차댈 곳조차 없으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식당 자리가 없거나 차댈 곳이 없으면 2층에 잠간 쉴 곳을 만들어 쉬도록 했다. 인터넷 하나 보고 네이버 지도하나 의지하여 오신 손님에게는 한 시간이내에 다녀올 개암사나 계화도를 느긋하게 다녀오도록 관광안내까지 한다. 매창공원이나 석정기념관은 30~40분이면 너끈하다. 황해도민회 사람이나 미국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계화회관을 찾아왔다.
처음 백합죽 장사를 시작한 것은 80년 초였다. 옛날 구 시장 수협 옆에서 조그만 가게를 얻어 문을 열었다. 식당이라기보다 자잘한 물건을 파는 구멍가게였다. 이 구멍가게는 손님을 그저 기다릴 뿐 끌어드리는 매력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간이 식당이랄까 막걸리, 소주에 오징어나 북어를 안주 삼아 출출한 손님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이었다. 정작 이 백합죽집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계화도 태생의 부인 이화자(李花子)씨 였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시장 바닥에 해장에 콩나물 국밥집이나 낮에 국시집은 있었으나 백합죽은 없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밀건 ‘꿀꿀이 죽’이 허기를 달랬다. 계화도 간척공사가 한창일 때 계화도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날품 파는 인부들이 돌을 나르고 흙을 퍼 날랐다. 이들의 허기를 달래는데 이 계화도 특유의 백합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황해도 송화 피난민, 군산 거쳐 부안으로 

키가 껀중하고 얼굴이 해맑은 소년 최국서 崔國瑞 가 과수원을 하던 아버지와 함께 38 이북인 황해도 송화군에서 인천을 거쳐 군산으로 퍼 넘겨진 것은 1951년 정초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30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밀릴 때였다. 산악이 많은데다 노도처럼 밀어붙이는 인해전술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동해의 원산 철수 작전처럼 서해 쪽에서도 철수 작전이 벌어졌다.
- 최 사장이 탄 미군 함정은 몇 만 톤이나 됐습니까.
“모르지, 하여간 8천명이 탔다니까”
- 황해도 송화에서 군산까지 오는데 며칠이나 걸렸습니까.
“모르지. 하여간 섬 몇 개를 거쳐 며칠이 지나 인천에 닿아서 많이 펐어. 다음에 군산에 거의 다 펐다고 그래요.”
- 그래. 어떻게 부안에 오시게 됐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송화 땅에서 벗어난 일이 없는데 군산을 알겠어, 부안을 알겠어. 그저 우리 피난민을 싣고 온 사람들이 짐 풀 듯이 펐겠지. 부안까지는 수백 명이 미군 제무시 타고 왔어”
6.25의 상처는 남북 할 것 없이 겪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 먹고 자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마저 각기 달랐다. 같은 부안이라 해도 산중과 들녘이 다르고 변산 접경이 또 달랐다.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이북 피난민’의 경우 유달랐다.
“지금 군청 동쪽에 큰 소금 창고인지 양곡창고인지가 있었어요. 수백 명이 거기 수용 되었어요. 어느 해 봄인데 나는 아버지를 따라 변산에 나무하러 갔어요. 지금 말하자면 상서 용와동 너머 우슬재로. 막 나무 짐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 저 산 비탈에 아세보 소총 총대 너댓 자루가 보이는 거예요. 이북에서 보던 그 기다란 이북 총 말이지. 움직이는 공비, 빨치산 말이지. 아버지가 황급히 내 귀에다 대고 잡히면 죽는다. 우리는 ‘이북 피난민’아닌가. 마침 내려오는 말 구루마가 있어 그 옆에 몸을 바짝 숨겨 따라 내려오는데 내리막길이니 이 말이 얼마나 빨리 달리겠소. 한참 내려오니 개울이 있어 개울 따라 내려오면 되겠다 싶어 한 5리는 내려 왔을 거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
꼭 68년 전 아홉 살 소년의 회상이다.

‘계화도 처녀’ 이화자의 아이디어 

-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별일 다 했지요. 이발사도 하고 노동판 막일도 하고 청과물 중매인도 하고……, 아 참 구멍가게를 하는데 막걸리 독을 땅에다 묻어, 밀주 공장이지. 오징어나 북어 가지고는 별 재미 못 봐. 그런데 집 사람, 저 이화자, 그때는 이순자라고 했어. 집사람이 ‘회평’(회무침)을 잘 해. 술이 거나하면 회평은 이거 몇 접시가 나가. 쓱쓱 썰어서 고추장에 버무리면 요리 끝이야.”
- 그때가 언제 였습니까.
“1980년 5.12” 
- 5.18 며칠 전이네요.
“그렇게 되나, 5.18은 훨씬 뒤에 들음들음 알게 된 거지만 5.12는 내가 계화식당 간판을 건 날이니까. 말하자면 우리 식당의 ‘창업기념일’이지. 이렇게 오래하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대견해. 이렇게 수십 년 할 줄 그때는 짐작도 못했어.”
-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꼭 39년을 음식점 한 업종을 하시게 된 건 어떤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까.
“집사람, 저 이화자를 잘 만났고 88올림픽 바람을 탄 거지요. 88올림픽을 앞두고 도나 군에서 지역마다 특색 있는 향토음식을 개발해서 키워야 겠다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어. 여기에 뛰어들었지. 사실 부안은 백합의 원산지이자 백합으로 떼돈을 번 곳 아닙니까. 부안하면 백합이다 이런 데에 눈 뜬 거지요.”

남자는 강의하고 여자는 백합죽 음식 시연하고. 전북 도청 주최. 80년 대

1970년대 10년 동안 부안은 백합양식으로 전국 첫째의 각광을 받았다. 한때는 일본 바이어들이 현금을 싸들고 부안양식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한해에 100억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 양식장은 무상으로 20년 동안 공유수면 점용권을 얻었고 종패만 집어넣으면 저절로 컸다. 강남 갔던 제비가 물어다준 박에서 금‧은 보화가 쏟아져 나오듯이 몇 키로의 종패를 바다에 쏟아붓기만 하면 2-3년 사이에 수십 배로 커졌다. 말 그대로 일투 천금이었다. 이런 호황이 어이 없이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두 해 사이에 계화도 앞에서 해창에 이르는 10여 키로 수 백 정보의 양식장이 온통 썩어갔다. 일본에서 공수 해오는 수입 종패에 대한 한국 검역당국의 태만 때문이라고 어민들은 주장 했다. 수산당국은 양식업자들이 밀식하는 바람에 조개가 질식한 것이라고 둘러 댔다. 부산의 해양수산연구소는 원인 불명으로 판정했고 소송은 원고인 양식업자의 패소로 낙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사장이 읍내 시장 한쪽에서 백합죽으로 새 국면을 열겠다니 행정당국의 관심은 커졌다고 한다. 80년대 초 최사장이 백합죽을 부안 명물로 신청하자 전라북도는 전주에서 각 시군이 신청한 음식을 대상으로 시연회를 열었다. 최 사장이 손 마이크를 들고 백합죽 강의를 하고 부인 이화자씨는 냄비를 걸어놓고 물을 끓이고 백합을 담그며 시연을 했다. 마치 텔레비전에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시연하는 바람에 한꺼번에 박수가 쏟아졌다. 최·이 콤비는 이를 계기로 서울과 전주의 신문은 물론 텔레비전에서 얼굴을 보였다. 어느 사이 백합죽집 계화식당은 부안의 식당에 그치지 않았다. 어디에서든 ‘계화식당’사이트만 열면 다양한 내용이 줄줄이 소개 됐다.
백합은 그냥 백합이 아니었다. 향토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부안여고의 김형주 선생이 가게에 오셨다.
“어이, 최사장! 생합 죽으로 유명해졌데. 부안에서는 생합이라 하지 백합이라고 안 히여. 백합은 보통명사야, 하지만 생합은 부안만의 고유명사 처럼 돼 있어. 이 생합(生蛤)을 인천 쪽에서는 상합(上蛤)이라고 한데. 백합 가운데 최상품이라는 뜻이지. 이 생합은 제 몸 안에 자생 기능을 갖고 있어. 그래서 몇날 며칠이 되어도 상하는 법이 없어. 아가리를 벌리고 영양 공급을 받았다가 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몸 안에 있는 독소를 뿜어 뱉어. 참 신기한 조개지. 몸 안에 있는 체액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다니! 동진이나 행안 하서 같은 부안의 갯가 사람들은 물론 읍내 사람들도 생합을 생으로 먹었지 삶아 먹거나 구어 먹지 않았어. 복쟁이 알 먹고 죽은 사람은 있지만 생합 먹고 배탈 났다는 사람 못 들었어.”
듣고 보니 그렇겠다 싶어 열심히 백합-생합 공부를 했다. 이 공부는 바로 바로 돈이 되어 돌아왔다.       

향토음식 1호 지정 증서

- 왜 읍내 시장 한복판에서 지금 여기 행안 신기리로 옮기게 됐습니까?
“일루 옮긴 게 2003년 4월 3일입니다. 방송을 타니까 승용차 뿐만 아니라 버스로들 와요. 한꺼번에 버스타고 세 팀이 와, 그래 부랴부랴 변산으로 나가는 국도 30호선 길가에 널찍하게 500 여평 밭을 사서 간판도 큼직하게 2층 벽면을 덮다 시피 백합죽집 ‘계화회관’이라고 부쳤어.”
한꺼번에 승용차 60대가 주차할만한 주차장을 마련했다. 객석도 150석.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일하는 사람은 10여명 되지만 주력은 가족이다. 최사장 내외에 셋째 딸 최나라가 카운터를 보고 주말이면 전주에서 커피 집을 경영하는 아들 최운이 배식을 한다. 10여년 동안 각기의 역할이 꽉 짜여져 척척 돌아간다고. 국도 30호선을 4차선으로 늘리면서 성황산 뒤로 돌아가는 바람에 기대하던 손님은 좀 줄었다. “어차피 휙 지나가는 손님은 지나가고 오실 손님은 거반 와요” 산전 수전 다 겪으며 생합의 진짜 맛을 전국에 알린 78세의 노사장은 아직도 뻘떡뻘떡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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