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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사람 26>향토문화개척의 기수 정재철 (鄭在喆) 선생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평생의 화두가 된 정재철 선생의 최근 표정 ⓒ장정숙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비젼과 노하우를 갖춘 막후 실력자

백산고등학교 교감을 지낸 역사학자 정재철(鄭在喆) 선생은 길에서 역사를 캐내고 길에서 문화를 발견하며 길에서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다. 그는 이 지방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서 월급을 받으며 그 상당 부분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녔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타일렀다.
“너는 왜 맨날 한다는 것이 길바닥에 돈 깔고 댕기는 일만 흐냐 이~”
어머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부안의 산과 들 바닷가에 박혀 있는 숱한 역사의 흔적들을 주워 모으고, 꼬부라진 허리를 펴며 토해내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예, 알았어요. 어머님 걱정하시는 말씀……” 어머니는 아들보다 손자들의 장래가 더 걱정이었다. “여기 저기 다니는 차비 별 돈 안 들어요. 걸어 다니니까요”
‘역사’는 30여 년 전 아버지로 부터도 핀잔을 받았다. 아버지는 어렵게 대학을 가는데 법대를 가기 원했다. 다른 많은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취직과 출세가 급했다. 정재철은 ‘사학과’를 갔으면 한다고 넌지시 말씀드렸다. “야, 역사 흐면 죽이라도 먹는 다냐?” 말단 경찰이던 아버지의 소원과 달리 엉뚱한 학과를 택한 것이 그토록 죄송스러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저 따르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나 향토의 역사를 캐러 현장에 나갈 때 어려움에 부딪히면 저는 항상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부끄럽지 않게 밥이라도 먹는다는 그런 심정으로 말입니다."

대학때 독서토론동아리 회원들과 속리산 여행(1979년)

아버지는 경찰

정재철은 1955년 8월 1일 주산면 화정에서 아버지 정득술과 전주 이 씨의 어머니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무렵 아버지는 주산지서에 근무하셨다. 아버지가 전근할 때마다 소년 정군의 학교가 세 번이나 달라졌다. 남원의 대산초등과 사매초등을 거쳐 정읍 영원초등을 나왔다. 1968년~78년 백산중‧고와 전북대 사학과를 마치고 군에 입대 81년까지 복무한다. 군대 갔다 와서 간신이 얻은 직장이 고창 무장에 있는 ‘영선고’였다. 임영신의 동생 임영선이 세운 사립고교다.
2019년 7월 초 정재철 선생을 부안읍내 육약국 3층에 있는 ‘부안독립신문’ 편집국에서 만났다. 내놓을만한 것이 없다며 사양하는 걸 억지로 붙들었다.

- 정선생님 역사에 대한 식견은 물론이고 글을 아주 잘 쓰십니다. 단어의 선택이 아주 적절하고 표현에 군더더기가 없어 아주 좋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공부 하셨습니까.
“뭘요, 할아버지 덕분이지요. 남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나를 정읍 영원에 계시는 할아버지 집에 보내셨어요. 식구 하나라도 덜려고요. 그런데 그것이 제가 문학에 맛을 붙이게 된 큰 계기가 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너 이야기 좀 해봐라’하시며 저를 귀여워해주셨어요. 저는 어린이들이 보는 책은 물론 옛날 중국이나 우리나라 위인들 이야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생각나는 대로 할아버지께 이야기 해드렸어요.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칭찬해주시며 ‘이놈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찬하셨어요.”

- 좋아하는 먹을 것이나 용돈도 좀 받으셨습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저 칭찬해주시고 머리 쓰다듬어 주시면 그만이지. 그러면서 하시던 말씀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책도 많이 보고…… 하시면서.”
어린 나이에 한동안 뜻하지 않은 조손가정이 된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손자는 우쭐하여 학교 도서실에 가서 새 책을 빌려 오기 바빴다. 두 분의 고모들이 할아버지를 모셨다.

- 고모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큰 고모는 초등학교 수학여행 갈 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목포 구경을 처음 했지요. 작은 고모는 어린이 신문을 보게 해주었어요. 소년 한국일보, ‘노란장갑 X’던가, 그런 신문 한 반에서 한둘 밖에 보지 않던 시절인데”
막내 고모는 하나 밖에 없는 조카를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기독교 신앙은 다정다감한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고모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처럼 타이르셨다. 어머니 못지않게 엄격하셨다고 한다.

- 고모들의 은혜가 선생님의 소년 시절 인성을 만든 셈이군요.
“저는 어려서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 했습니다. 백리 밖 외지에 계시는 부모님과 얼마동안 떨어져 살면서 얻은 선물인 셈이지요.”

부안 전교조의 본산, 백산고

역사는 요술쟁이다. 자기가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은 역사도 세월이 지나면 잊고 만다. 자기가 직접 고통을 당한 역사가 아니면 남의 역사가 되고 만다. 노동조합의 투쟁 또한 그런 역사의 요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의 압제 아래서 합법적인 노조는 어용으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등에서 단단한 땅덩어리를 비집고 나온 비합법 노조는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탄압은 물론 노조로부터도 외면당했다. 교원들의 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은 이에 비길 바 아니었다.
“아니, 선생님들이 노동자야, 선생은 스승이야, 만인의 사표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노동자로 행세하려고 해”
학부모는 물론 동료교사들 까지 피식피식 웃었다. 경찰이나 정보기관, 심지어 일부 언론까지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고향이자 모교인 백산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부임한 정재철 선생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반 학생들과 개암사 자건거 여행 후 저수지에서 (1983년)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자나 깨나 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지금 쓰고 있는 국사 교과서는 남북의 다툼을 극대화하여 통일보다는 분단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과 미국과 소련의 영향으로 갈라진 남북을 언제까지 당연시하며 산단 말인가. 친일파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 역사 교과서를 가르치는 부끄러움도 컸다. 도대체 자라나는 세대에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광주 사람을 무참히 살해한 전두환은 감옥에 가야 하는데도 오히려 대통령을 하는 1980년대 현실에서 역사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수업을 하다가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교육의 방향이 가르치는 방법에 치중할 뿐 정작 학생들이 배워야 할 정신이나 본질에서는 떨어져 있었다.”
정선생은 ‘전교조’ 이전인 88년 ‘전교협’(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부터 이런 운동에 참여 했다. 같은 백산고의 이송렬 선생과 함께였다. 각 학교에 평교사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몇 분의 선생님들과 적당한 책을 골라 ‘학습’을 시작했다. 정 선생이 살고 있는 전셋집 방 하나가 토론하고 연구하는 학습장이 되었다. 전세 사는 처지에 낯익은 선생들이 들랑거리니 주인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다음해 1989년 5월 28일 마침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발족한다. 부안에서는 이런저런 진통을 거듭했다. 마침내 정 선생은 부안지역 책임자(지부장) 로 총대를 멨다.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명예가 아니었다. 학교로부터 쫓겨나는 것이 확실한 수난을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국에서 1,527명의 교사들이 파면되거나 해임되었다. 부안에서도 백산 신죽 초등에서 한 사람과 부안 여고에서 두 사람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들에게는 노조운동 정도가 아니라 ‘좌경의식화 교사’라는 너울이 씌워졌다. 전두환, 노태우의 유신 살인정권의 후예들은 못할 짓이 없었다.

위도가는 배에서(1982년)

  ‘내 사표를 받으시오’ 채관석 교장의 결단

전국을 휩쓴 광란의 회오리바람 속에 부안 전교조의 총본산이라 할 백산고에서는 왜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는가. 백산고의 채관석 교장은 자기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들의 운동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이를 찬성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학교 밖으로 쫓아낸단 말인가. 정 그렇다면 제 사표를 받으시오”
교장은 재단에 사표를 냈다. 재단은 교장의 사표를 받을 수 없었다. 그 교장에 그 재단이었다. 전국의 어느 지방에서도 이런 의연한 교장이나 재단은 없었다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한겨레신문은 크게 썼다. 그 교장이 채관석 선생이다. 채 교장은 재단 설립자의 한사람인 정진석 선생과 같은 시기 일본 강점 말기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이다. 그는 태풍의 눈, 정재철의 백산고 은사였다. 백산고의 상징이라 할 정진석 선생은 그 무렵 부안에서 선출된 전북도 교육 위원이었다.
그때의 정황에 대해 정 선생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경위를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조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자술서 요구’에 대해 짤막하게 말한다. “교장선생님은 어떤 경우에도 백산에서 내가 교장으로 있는 한 선생님을 학교 밖으로 쫓아낼 수 없다는 그런 신념을 관철 시킨 것이지요.”
실상 그 해직 대상 교사들은 법을 위반하지도 않았고 교칙이나 교사의 품위를 훼손한 일이 없다. 지금이니까 아주 까놓고 이야기 한다면 그들은 수십 년 끈질기게 이어온 분단의 논리, 유신의 망령, 살인의 주술에 현혹되거나 굴복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해직교사들이 복직되었다. 94년 4월이었다.
지난날의 동지들이 복직이 되자 정재철 선생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였다. 지역사 공부를 위해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 일반 역사에서 지역사로 방향을 잡았다. 현직 교사로서, 더구나 40이 넘어 가르치는 공부가 아니라 배우는 공부를 하는 것은 이중의 고역이었다.

향토 문화, 시민운동의 중심축

부안 전교조의 지도자 정재철 선생은 일찍부터 일을 벌려온 농민운동, 종교 활동, 핵 폐기장 반대 투쟁, 환경운동 같은 투쟁을 거치면서 부안의 반체제운동세력과 쉽게 교류한다.
90년대 말에는 ‘부안 시민문화모임’을 꾸리는가 하면 2003년의 핵 폐기장 반대투쟁에 참여해 이를 막아내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진한 위도 핵 폐기장 사업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자부 장관과 전북지사, 부안군수를 충동하며 몇 달 동안에 걸쳐 수천 명의 경찰 병력으로 부안군민의 데모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환경을 지키려는 강고한 투쟁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초등학생의 등교거부 사태까지 일으킨 반대투쟁의 이면에는 전교조의 힘이 컸다.
2009년 부안역사문화연구소가 발족하고 ‘부안이야기’ 창간호를 냈으며 2019년 초에는 부안독립신문과 함께 군청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들 향토 문화 사업의 책임자가 누가 됐든 백산고등학교 정재철 교감은 씽크 탱크이자 막후 실력자였다. 지난 10년 동안 ‘부안이야기’는 20호를 냈고 부안독립신문에 한호도 거르지 않고 2년 2개월 동안 연재한 ‘부안문화의 밥과 꽃’은 101호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생각입니까? 넌지시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향토 부안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사를 쓰고 싶어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입니다.”
몇 년 안에 제대로 된 향토사, 선사시대의 유적부터 1,000년 전 민중에서 오늘의 역사를 이룩한 현대사의 주역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본격적인 향토민중사를 기대해 본다.
부인 고미희 여사, 원광대 사학과를 나온 초등학교 교사의 딸. 1남 2녀를 두고 있다.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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