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부안을 항상 그리워한다. 청소년 성장기에 남성 중·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익산으로 떠났으니 부안에서 어린 유년시절과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방학이나 성묘를 위해 자주 고향을 드나들었으니 해외에 나갔던 때를 제외하고 고향을 오랫동안 떠난 적은 없는 셈이다. 유년시절은 변산 산기부락에서, 초등학교 시절은 조부모가 살고 계시던 행안 월성부락에서 보냈다. 그래서 변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 행안의 너른 평야를 무대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었다. 이 시절에 필자의 가슴 속에 저장된 서정적 이미지들은 학자와 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도봉지역은 사방이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둘러싸여서 어느 곳에 못지않게 경관이 수려하다. 서울의 많은 곳을 마다하고 도봉지역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고향 산천의 자연미를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변산의 산자락과 성천 앞바다의 모래사장이 너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고향 부안은 필자의 예술과 문학을 수련할 수 있도록 마음의 터전을 제공한 스승이자 은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사월 필자는 부안과 변산 일대를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너른 평야와 푸른 바다는 여전히 필자를 마치 푸근한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부안읍을 잠깐 둘러보고 내소사 기슭에 살고 있는 귀향한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변산 입구 해창에 다다랐을 때 어쩐지 어릴 적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해창 너른 펄에서 여기저기 조개를 잡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새만금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변산의 백합과 다양한 조개들은 생명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필자는 바다를 바라보며 부안이 낳은 노동자 시인이자 생태시인인 동생 박영근의 “해창에서”란 시를 조용히 읊조렸다.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홀몸 조개미 아짐/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지금은 폐항도 아닌/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바닷속으로 비/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영당(靈堂)자리에 비/수십킬로 뻘을 질러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타는듯 붉은 노을이 내려/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온통 환하게 몸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 갈 뿐이다/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갯벌을 건너

박영근은 새만금 개발로 인해 사라진 바닷가 풍경과 어촌의 빛바랜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있다. 어쩌면 문명인들은 초라한 것으로 간과할지 모르지만 시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친구와 함께 변산 해변을 둘러보면서 끝없이 바다와 산자락만 펼쳐졌던 고향이 엄청나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바다로의 전망을 막아서며 필자를 밀어내며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 고향 변산은 필자가 가슴에 깊게 새겼던 서정의 보고가 아니다. 혹자는 이런 개발이 부안의 자랑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의 개발이 고향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안이 지켜내야 할 보고는 거대한 건물덩어리가 아니라 바로 아름다운 자연과 생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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