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정재철 선생이 연재한 ‘부안 문화의 밥과 꽃’ 후속으로 부안군동학인문TF 전문위원이자 문학박사인 박대길 선생이 ‘부안 동학농민혁명사’를 약 2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그늘 속에 가리워져 있던 새로운 유적지와 부안 농민군의 발자취 등 새롭게 밝혀진 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면서 우리 고장의 자긍심을 한층 고양시키리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말  

 

부안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단연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백산대회이다. 여기에 부안에 동학을 포교하고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대접주로 활동한 김낙철(金洛喆)이 있고,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도소(道所․집강소) 건물로 전하는 신원재(愼遠齋)가 있으며,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맺으리라.(開花於扶安 結實於扶安)”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예언이 전한다.
그러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부안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와 위상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1894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결정적인 사건, 예컨대 승리하거나 패배한 격렬한 전투도 없었고, 동학농민군과 관(官) 또는 지역의 토호(土豪)세력 사이에 극한 대립이나 갈등으로 인한 보복과 살인 등이 거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기 부안은 동학농민군과 관이 협치(協治)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되었고, 부안 사람들 역시 이에 적응함으로써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다.
그래서인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로 5~6곳이 전하고, 해마다 대표적인 행사로 백산대회 기념식이 개최되지만 아직은 백산면 단위 행사에서 그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1894년 당시 부안읍내에서 동학농민군이 처형당한 장소와 인물에 대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려는 노력도 부족했던 것 같다.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고부와 고창과 인접하고 1876년 개항(開港) 이후 일본인의 왕래가 잦았던 줄포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의 움직임도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894년에 일어난 사건들, 특히 부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록으로 남길 역사적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아예 단절되어 영원히 찾을 수 없거나 복원할 수 없는 사건도 있지만, 어디엔가 기록이 전한다면 찾아야 한다. 얼마 전까지 5, 6곳 정도로 알려진 부안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유적지가 20여 곳이 넘게 확인되었다. 이에 새로 발굴된 유적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추적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125년 전,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동학농민군의 열망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향한 염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까이는 촛불혁명과 맞닿아 있고, 최근에는 일본의 경제보복조치와 직결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한다. 125년 전, 부안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 역시 미래를 위한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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