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동학을 새롭게 풀 ‘열쇠의 땅’


『부안독립신문』에서 동학(東學)사상과 1894년의 동학혁명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달란다.

21세기에 왜 굳이 지나간 옛것에 다시 눈을 돌리려는 것일까? 오래된 옛길에서 새 길을 찾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려는 마음가짐 때문이요, 가장 민족적(民族的)인 것에서 가장 세계적(世界的)인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19세기 조선 민초(民草)들의 사상이자 민초들의 혁명이었던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을 21세기 민초들의 눈으로 다시 공부하고 다시 해석해 냄으로써 이 땅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 지구촌 사람들이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 해결에 필요한 지혜를 찾아보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통일신라시대에 진표 율사가 부안 땅을 찾은 이후, 이상향의 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부안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先知者)들과 뜻있는 지식인들이 다투어 찾아 들었다.(『부안김씨고문서』 참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革命家)들도 다투어 몰려들었다. 조선후기(朝鮮後期)와 근대(近代)에 들어와서는 동학당과 서학당, 영학당과 활빈당 등 변혁(變革)을 꿈꾸던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어 저마다의 꿈과 소망을 펼쳐보고자 하는 변혁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종교운동과 정신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종교가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예를 들면, 18년간이나 우반동 반계서당에 칩거하면서 조선 실학(實學)을 대표하는 대저술인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 선생. 월명암(月明庵) 주지로 있으면서 반농반선(半農半禪)의 기치를 내걸고 불교개혁운동을 펼쳤던 백학명(白鶴明·1867`~1929) 스님. 1916년에 원불교를 창시했던 소태산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가 5년간 변산에 은거하면서 교단 창건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던 사실 등은 부안 땅이 지닌 잠재력, 신비스러움, 무한한 가능성 등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안 땅의 가능성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는 또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1891년 음력 7월의 어느 날.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 선생이 부안 땅에 왔다. 옹정리(瓮井里·현재의 부안읍 옹중리)에 사는 김영조(金永祚)라는 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것이다.(『김낙철역사』 참조) 이때 해월 선생은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花開於扶安 結實於扶安)”라는 말을 했다. 장차 동학의 역사에서나, 민족의 역사에서 부안이야말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 커다란 결실을 맺게 될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부안이 역사적으로 이상향의 땅이자 변혁을 위한 성스러운 공간으로 손꼽혀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부안 땅이 최근에 우리 시대가 낳은 커다란 사회적 질병인 ‘개발논리’ 앞에 노출되어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다. 고통이 컸었던 만큼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도 강한 것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동학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동학에 대한 오해 몇가지

동학이야기를 풀어 가기 전에 우선 먼저 동학에 대한 세간의 오해 몇 가지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첫번째 오해는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립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동학을 설명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등장하는 동학이 서학(西學)을 ‘깊이’ 의식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은 서학에 대해 ‘운즉일(運則一), 도즉동(道則同), 이즉비(理則非)’라 하여 동학과 서학은 하나의 시운(時運)이며 도(道)도 같지만, 이치만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무조건 서학을 배척하고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서학이 지닌 근대성(近代性)과 보편성(普遍性)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을 그저 서학에 대한 대항이데올로기로서 성립된 사상이라고 보는 세간의 이해는 온당한 이해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두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조선 사람들에게 알맞으면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가장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민초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의 결과물이 바로 동학이며, 그것을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수운 선생이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두번째 오해는 동학은 기존의 유불선 삼교사상에서 장점만을 따온 혼합사상이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사이비 사상이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유학(=성리학)이나 불교, 도교 등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주장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학은 유불교 삼교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유불선만 포함하지 않았다. 서학도 포함하였다. 서학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감록사상을 비롯한 민간 신앙적 요소도 두루 포함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 이 땅에서 유행하던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여 성립된 사상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런데 동학은 기존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저 포함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포함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학의 독창적 측면이다. 봉건적 굴레와 외세의 침탈 때문에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살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서학, 더 나아가 민간 신앙적 요소마저 포함하여 이 땅의 새로운 생명사상으로 정립해 낸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러므로 동학이 기존사상을 포함한 것만 주목하고, 기존사상을 넘어서 새롭게 창조해 낸 독창적 요소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학을 이해하는 온당한 태도는 아니라고 하겠다.

포함삼교, 서학, 민간신앙까지 포함
뭇 생명 살리기 위해 등장


세번째 오해는 동학을 하나의 Religion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학은 절대로 Religion이 아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동학은 Religion이라는 용어, 즉 그것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용어가 이 땅에서 대중화되기 이전에 성립되었다. Religion으로서의 종교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00년대부터이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과 같은 근대적 신문,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 등과 같이 신문화운동을 펼치던 각종 학회들이 펴내던 잡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부터 비로소 종교라는 말이 널리 쓰여 지기 시작하였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용어 역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동학이 종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운 선생님 말씀을 빌리자면 “도(道)로써 말하면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요, 학(學)으로써 말하자면 동쪽, 즉 조선 땅에서 받았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는 것이다.

도라는 관점에서는 천도이고, 학문이라는 관점에서는 동학이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이 마땅히 밟아가야 할 길이요, 사람이 마땅히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야 할 우리 학문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교단의 원로(元老)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하나. 일찍이 동학의 선배들은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한다’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동학이 Religion이 아닌 까닭이 숨어 있다. “동학을 한다”는 말은 동학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할 길이요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겠고, 이른바 유일신(唯一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분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요약하자면,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학의 장점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하여 가장 자주적인 학문을 지향하고자 했던 동학! 포함삼교(包含三敎)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 신앙마저 포함하여 뭇 생명을 다 살리기 위한 새로운 생명사상으로 등장했던 동학!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조선 땅 도학(道學)의 새로운 전개로써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학!

부안동학을 대표하는 인물 김낙철, 김영조

그런 동학이 전라도 부안 땅에는 언제쯤 들어오며, 누가 먼저 동학을 받아들였을까? 부안 동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 출신 김낙철(金洛喆·1858~1917) 대접주와 옹정리 출신 김영조(金永祚)가 있다. 김 대접주는 부안에서 대대로 살아 온 명문 양반 집안 부안 김씨 문중 출신에다 지주(地主) 신분이었다.

6일 오전 부안읍 쟁갈마을에서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왼쪽)가 동학답사에 나선 주민들에게 김낙철 대접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염기동 기자

양반에다가 지주였던 김 대접주는 무엇이 부족해서 동학에 입도했으며, 무엇이 부족해서 혁명 대열에 가담했을까? 그리고 무엇이 부족해서 여러 차례나 투옥되면서까지 동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했던 것일까?

김 접주의 존재는 동학이 없는 자들만의 사상이 아니요, 동학혁명이 단순한 민중반란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김 대접주는 또한 1차와 2차 동학혁명에 모두 참여했던 지도자였으면서도 해월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른바 북접(北接) 계열의 지도자였지만, 1893년 2월의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운동에 적극 참여했을 뿐 아니라 1·2차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했다.(『전봉준판결선고서 원본』 참조) 이런 사실은 갑오 동학혁명을 남접(南接), 즉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지방의 ‘지역’ 단위의 혁명으로만 이해하려는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시사한다. 요컨대, 동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의 땅이 바로 부안 땅이요, 열쇠의 인물이 바로 김낙철 대접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