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빠르고 걸음 빠른 조광제 회장 ⓒ장정숙

“친목단체가 만만치 않습디다”

말 빠르고 걸음 빠르고 판단 빠른 ‘3속’

재경부안군 향우회 조광제 회장은 말 빠르고 걸음 빠른데다 당장 판단을 내리는 칼 같은 판단력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올해 만으로 66세, 1953년생이다. 중앙정보부도 어딘데 청와대 사정비서관 국정원 대북사업국 단장 등 어마어마한 권력기관에만 28년을 바쳤다. 흔히 쓰는 ‘근속 몇 년’이라는 표현 대신 ‘바쳤다’고 쓴 것은 남이야 어떻게 보고 밖에서야 어떻게 생각하든 나라의 최고 핵심기관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 기관 내부 사람들은 다른 국가기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도의 기밀을 다루며 그들의 존재 가치는 하루하루, 아니 시간을 다투어 판가름 난다.
이런 속에서 28년을 근속했다니 이 사람이 금수저를 물고 나왔단 말인가, 비상한 재주가 있단 말인가. 하도 궁금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한쪽에서 만났다.
      
-향우회장 연임을 두고 이런 저런 말이 있었다던데 웬만큼 가라앉았습니까. 
“뭐 다 지난 일 인데요, 뭐. 제가 더 꼼꼼하게 챙겼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한 데도 있고, 또 친목단체란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지 않아도 귀가 어두운 데다 말까지 기관총 쏘듯이 쏘아대니 말의 뜻은커녕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필자가 그 곡절을 다 아는 것으로 짐작하고 하는 말 같은데 정작 그 경위를 필자는 전혀 모른다. 그저 인사말로 건넸을 뿐이다. “회장님” 하고서 그 얼굴을 쳐다보며 천천히 제가 묻는 말만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다. 제 반응이 없으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비단 조회장과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다른 분 인터뷰 때도 듣는 사람 본위가 되니 말하는 사람에게 많은 불편을 준다. 유달리 이분 말이 조금 빠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더 어려워 이렇듯 가외의 주문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 6월말 총회작업에 한창 바쁘겠군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일사천리, 속전속결로?
“아니지요. 제가 평소에 좌우명으로 삼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일일 삼성이라고, 원래는 하루 세 번 아침에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고 낮에 돌아다보고 또 저녁이 되면 다시 돌아 봐라 이런 뜻이래요.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에 생각하고 하면서 돌아보고 하고 나서 돌아본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을 제 좌우명으로 삼아 왔어요. 제 중학교 때 백진기라는 국어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분이 칠판에 쓰시면서 하신 그 광경까지 선합니다.”

어느 날의 청와대 문재인 비서실장과 함께

정보부 시험날이 10. 27.

-정보부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요?
“10.26 아시죠. 우리가 시험 본 날이 바로 그 다음날 10월 27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채 정규과정 17기입니다. 정보부로선 마지막이지요. 그 뒤엔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이니까.”
-아, 그랬습니까. 어떤 연고로 그쪽을 택했는지?
“저희 대학교(건국대 법학과) 법대 학장으로 계시는 김용한 교수님이 하루는 저를 학장실로 불러요. 이것저것 졸업 후 장래 진로를 물으시더니 언제 붙을지 모르는 사법시험을 보느니 차라리 정보부 시험을 보면 어떻겠는가, 성적이 좋은 졸업예정자 가운데 선발하는데, 중추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 아닌가. 이렇게 권하셨어요. 국가를 위한 유위한 청년을 추천한다면서……”
취직 정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다는 말이 번쩍 귀에 들어왔고 거기에다 ‘유위한 청년’이란 말이 가슴을 뛰게 했다고 한다.
-기억이 대단 하십니다. 40년 전 일인데.
“그때는 젊었을 때 아닙니까. 유위한 청년이란 말은 그때도 잘 안 쓴 말인데 교수님은 우리를 격려할 때면 잘 쓰셨어요.”
유위(有爲)한 인물이란 아주 쓸모있는 대단한 인물이란 뜻인데, 그때는 아주 영웅적인 일을 할 만한 인재로 알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추천도 엄격했다고 한다.       
-70년대는 학생과 재야의 유신 반대에 대한 저항이 대단했던 시기였는데 여기에 대한 고민이랄까 주저랄까 이런 건 어땠는지.
“글쎄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은 것이 아니었나, 어떻든 취직이 급했으니까요. 그리고 정보부에 있다고 다 나쁜 일만 하는 건 아니고 수집된 정보를 어떻게 활용 하느냐에 그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청와대 파견 4년 반 김대중 정권과 함께

조광제는 입사하자 줄곧 18년 동안을 법원과 검찰, 흔히 말하는 법조 출입을 했다. 그 역할도 정권의 부침 성쇠 따라 크게 달라졌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시기다. 특히 1987년의 민주 항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전과 후에 정치체제나 사회체제에 큰 변혁이 있었고 정보부의 개편은 물론 출입처의 변동이 잦았는데도 그는 그때마다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다.      
9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제의 집권은 정보부에서 ‘법조 출입’하던 조광제를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파견으로 발탁하기에 이른다. 김대중 5년 재임 중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여러 요직이 여러 번 바뀌었다. 요동치는 그 속에서 요지부동하던 자리가 이름으로 보면 예쁘게만 보이는 ‘법무비서관’이라는 자리다. 수사 정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이 직책의 책임자가 왕년의 대검중수부의 핵심 박주선이었다. 김태정 검찰총장에 청와대의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실상 청와대 권력의 핵심이었다. 바로 그 밑에 사정국장 조광제가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말기 몇 년 동안 그는 대북사업국 단장과 국장을 맡았다. 대북정보 수집망 구축에 공헌한 그의 공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공을 공으로 자랑하지 못하는 엄격한 정보부의 함구 방침 때문에 ‘쬐끔도’ 말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맞대고 싹싹 비볐다.

이희호 여사 조문, 청와대 시절 행정관들과 함께.

회사 고문, 대학법인 이사로 휴식 없는 노년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고 한다. 정년퇴직 후 가진 직함만도 10여 개다. 모두 이력서용이거나 명함용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보수를 받는다고 한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필자와 이야기 하는 중에도 10분이 멀다 하고 핸드폰을 받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잠깐 뒤돌아서서 1-2분으로 처리한다.
“죄송합니다. 김 의원님과의 면담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어서 전에 약속한 분들 전화라서 죄송하다, 다음 연락하겠다고 말씀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지금 제가 관계하는 곳이 여러 곳입니다. 안양에 있는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만 하더라도 대학법인의 상임이사와 대학 발전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학교를 세운지는 20여년 밖에 되지 않으나 최근 몇 년 동안에 부쩍 성장 했어요. 지난 4월에 장병집 박사가 총장에 취임하고 나서 교육부와 평생교육진흥원이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로 선정했고 역시 한국연구재단이 ‘인문사회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선정 되었어요. 작은 대학이고 아직 틀이 제대로 잡기 전이니 이사회나  대학 당국이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보입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재미가 붙어요.”
-그 동안 해외 유학이나 학위는 어디서 하셨는지?
“현대 사회, 특히 21세기는 학교 간판 가지고 먹고 살고 이력서 가지고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가장 바쁜 직장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공부 했습니다.”
95년 건국대 대학원, 노사행정(석사), 2004년 건국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2002년 9월부터 1년간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객원연구원, 2005년 8월부터 6개월간 서울대행정대학원 국가정책발전과정(61기), 2007년 3월부터 8월까지 세계경영연구원(IGMP)최고경영자과정(7기), 이밖에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2017년 12월엔 국방안보포럼 안보 위원장의 책임을 맡은데 이어 국방부 국방개혁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민주평통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부인 김경순 여사 손자 조성윤(3)

갑작스레 맡은 향우회장

-향우회장은  어떻게 맡게 됐습니까?
“2015년 3월 장종대 회장이 몸이 불편해서 갑자기 그만 두시게 됐어요. 장군 출신으로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임기 중에 그만 두신거니 어떻게 하겠어요. 회장을 지내거나 회의 원로라 할  여러분들이 저를 강권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한테 떠밀렸습니까.
“박희원 청장이나 김채옥 교수, 김손 회장, 고갑수 회장 이런 분들이 생각납니다. 그밖에 많은 분들이 저 밖에 할 사람이 없다니 한사코 거절하기도 좀 뭐 해서.”
-그런데 지난봄에 왜 향우회가 어수선하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봉사 단체인 향우회를 국회의원이나 군수 선거에 이용하려는 게 병통이었지요. 그것까지도 챙겼어야 하는 건데.”
재경부안군 향우회는 아마 전북도 내에서는 첫째 둘째로 먼저 생긴 향우 모임이었다. 5.16 한참 뒤인 1964년 3대와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申)규식 씨(1903-2002)가 만들어 초대와 2대 3대 회장을 했다. 웬만하면 연임하는 것을 관례처럼 여겼다. 향우회 조직이 국회의원이나 군수 선거에 도움이 된 예는 없었다. 향우회 자체가 친목단체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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