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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 꽃100> 허영만의 ‘식객’의 무대 곰소염전에서

부안에는 소금과 관련된 땅 이름들이 많다. 계화의 대벌리는 염소(鹽所)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창북리 앞에 있는 산이 염창산(鹽倉産)이다. 여기서 염소는 소금을 굽는 마을이고 염창산은 소금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 산이란 뜻이다. 창북리는 소금창고의 북쪽이라 하여 창북(倉北)이다. 줄포에 남아 있는 소금애피라는 지명도 소금장수가 쉬는 주막거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부안의 소금 생산은 대개 자염(煮鹽)이었다.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뒤 가마솥에 끓여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갯벌을 갈 때 소를 이용했는데 소가 땡볕의 갯벌일이 너무 힘들어 헉헉거리다가 쓰러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해방 후 부안에서  천일염(天日鹽)을 만드는 곳은 지금의 곰소(남선염업주식회사)와 하서 큰다리 옆의 오성사라는 염전이 유명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부안의 해안 지역에서는 자염도 함께 생산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곰소염전을 지나며 흔히 보던 풍경은 염전 옆의 천막 등에서 포대에 담은 소금을 팔던 모습이다. 오랫동안 변치 않는 모습의 곰소염전이 추억처럼 여러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곳이 허영만의 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다. 한때 곰소염전이 골프장이 될 거라는 이야기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제자 신군이 서울에 있다가 곰소 염전으로 왔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한번쯤 들러야할 텐데 하다가 며칠 전에 들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곰소염전의 산 증인이신 부장님과 한 시간 여의 대화는 염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다. 곰소염전의 경영진들과 노동자들이 최고의 소금을 만들겠다는 자부심으로 미네랄 함량이 많고 쓴 맛이 없는 소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치킨을 튀기는 기름을 계속 사용하면 양질의 상품을 만들 수 없듯이, 소금도 간수를 바꾸지 않고 계속 쓰면 좋은 소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쓰던 간수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바닷물을 끌어들인다. 이러다 보니 다른 염전에 비해 생산량이 삼분의 일 정도로 줄었다. 간수를 철저히 빼기 때문에 전처럼 1년 전에 소금을 미리 사서 간수를 빼서 먹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소금은 4월말이나 5월초에 생산을 시작하면 10월 중순이면 끝난다. 특히 5,6월의 생산량이 1년 생산의 60%에 달한다. 소금은 기후 환경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염전에서 일하는 염부들은 하늘을 보고 일기예보를 체득해야 한다. 비라도 올라치면 염수들을 저장고로 빨리 보내야 한다. 그래서 염부들은 염전 주위에 붙박이로 살며 수시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염전에 몸을 대고 산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힘든 염전 일을 기피하는 동안 염부들의 나이는 고령화되었다.
전에는 소금을 걷으면 걸대를 어깨에 메고 창고까지 옮겨야 하는 노동 강도가 센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기계화 되었다. 물자세도 없어져서 한낮에 염수를 옮기는 수고도 없어졌고 생산된 소금은 염전대차로 실어 옮긴다. 보통 5정보(15,000평)를 네 명 정도가 맡아했는데 지금은 두 명이 맡는 경우가 많다. 부부나 부모를 돕는 아들이 함께하기도 한다. 여름날 염전 옆을 지나가도 일하는 염부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이들이 꼭두새벽에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곰소염전 자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지만 이곳에 더하여 소금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소금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소금의 생산을 손에 만지듯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변산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코스가 내소사라면, 그 옆 소금밭에 들러서 역사도 보고 다양한 소금 상품을 두 손 가득 들고 가는 희망도 그려본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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