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심부름 1등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임기태 전 의장 ⓒ장정숙

“잔심부름 1등, 아무 것도 아니여”

정치, 교육, 체육계의 풍토 개혁 밑거름

명예와 권력을 단번에 차지하는 것이 선출직 공직자다. 어찌 대통령 하겠다고 아귀다툼 하는 것만 선거인가. 이 아귀다툼은 도지사나 군수나 국회의원, 도의원, 군의원 할 것 없이 어김없이 벌려야 하는 게임이오, 싸움이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한두 번 떨어지면 더 높고 먼 나무 가지로 뛰지 않는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정글의 왕자, 맹수도 사냥할 힘이 부치거나 뜯어먹을 앞니와 어금니가 시원치 않다 싶으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을 먼 곳으로 슬금슬금 떠난다. 거기 그대로 있다가는 자식 손자 놈한테 뜯어 먹힐 테니까.

군 의장 한 번 하고 딱 불출마

임기태 전 의장은 2006년 군 의원에 첫 출마 당선되었다. 재선에 실패, 4년 뒤인 2014년 2선이 되자 후반기 의장을 맡았다. 군 의원 두 번 하고 그만 둔 임기태 의장의 불출마를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더러 장한 일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왜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많이 아쉬울 텐데.
“그 거 1년 전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아쉽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군 의회 의장이 될 때부터 앞으로 의원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보다 의장을 먼저 한  오세웅, 홍춘기 의장 같은 분도 출마하지 않았어요. 뭐 아주 제 불출마를 대단하게 이야기 하는 모양인데 저로서는 과분한 칭찬입니다.
-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2005년까지 면 서기부터 면장 까지 35년 인가, 쭉 부안군 안에서 근무했습니다. 행안면장과 부안읍장만 빼고 산내면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진서면장까지 10개 면을 뺑뺑 돌아가며 면장 했어요. 그때는 면서기를 하는데도 보증을 세워야 했어요. 고등공민학교 교장인 이우정 선생님과 교감인 윤갑철 선생님이 보증해 주셨어요. 내 뼈는 그 야간학교에서 단련된 것이지요.” 영국에만 ‘이튼스쿨’이 있는가.
-‘거물 면장’이네요.
“거물까지야 아니고 면장치고는 ‘골동품 면장’이지.”
-거물이야 흘러간 사람이지만 골동품은 세월이 지날수록 빛나지 않습니까, 값도 백배 천배나 평가 받고.
“과분한 말씀이고 꿈보다 해몽이 좋네요. 어떻든 저는 처음 공무원 시작할 때부터 이건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일했고 처음 군의원이 되었을 때도 ‘큰 출세’로 알았어요. 그런 사람이 군 의회 의장까지 했으면 그만이지 뭘 더 욕심내요.”
-욕심이 아니라 아쉽지 않았을까, 대단한 결단이 아닐까, 그런 결단이 어디서 나왔을까, 달리 보이네요.
“다른 할 일도 많은 데 거기에만 매달릴 수 없지 않습니까. 해보니까 일반 행정 공무원은 ‘정말 내가 면민의 공복이다’ 하고 열심히 일만 하면 그런대로 나가요. 헌데 선출직 되고 나면 동내 끼리, 사람들 끼리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가 있어요. 주위의 평판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밖에서는 알지 못하는 이런 저런 고충에 짓눌려요.”
군대는 고등학교 나오자 바로 갔다. 전방 12사단 52연대 3대대, 주특기는 암호병. 나중에 알고 보니 노무현 대통령도 그 무렵 사병으로 같은 사단, 같은 연대에 있었다고 한다. 키가 158센티라던가, 160만 되면 장교시험 볼 텐데 그것마저 자격이 없었다며 피식 웃었다.
 

부안군의회 의장 시절

중학교도 못 간 고등공민학교 출신

필자가 이 양반을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든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서 만났다. 키가 작달막하고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만큼 작았다. 거기에다 고개를 들고 이야기 하지 않으니 그쪽까지 시선이 쏠리지 않았다. ‘군 의원을 지낸 분’이라고 옆 사람이 소개 한 듯하다. 지금 이 양반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필자에겐 뉴스요, 감동 스토리가 되는 건 이런 연유 때문이다.
꼭 1년 전까지 군 의회 의장을 지낸 임기태.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다. 향교 동쪽 성황산 끝자락에 어설프게 자리 잡은 청우 고등공민학교 출신 (2회. 84명)이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거쳐 부안농고 15회다.
행안 고성초등하교를 나온 소년은 중학교 갈 돈이 없었다. 2년 동안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모자 쓰고 교복 입고 학교 가고 오는 걸 보면 미칠 것 같았다. ‘그 놈의 학교’에 가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까운 읍내로 뛰쳐 나갔다. 읍내 시계탑 근처 지금 박가네 식당 자리에 ‘성심옥’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거기에서 심부름도 하고 음식 배달도 했다. 한 보름인가 20일인가 되었을 때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가 ‘잡으러’ 오셨다. 소년은 학교에 보내주면 가겠다고 버텼다. 마침내 아버지는 승낙하셨다. 야간학교. 야간학교면 어떤가, 중학교 아니고 고등공민학교면 어떤가. 소년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 똘길 밭길 산길을 따라 판자집 ‘학교’에 갔다. 중학교 과정 3년제 6학급이었다. 당초 중학교 못가는 여학생을 위해 1년 전에 세운 이 학교는 그 이듬해 1962년부터 남녀 공학으로 바뀌었다. 소년은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가끔 1등을 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있어요? 험한 학교 다닐 때나 말단 공무원 할 때나 저는 자신이 있었고 당당했어요. 현실에 충실하자, 이것이 제 모토였어요.”
청우 고등공민하교 교훈은 유달랐다. 다른 많은 학교들처럼 판에 박은 말이 아니었다. 1. 어질자 2. 의롭자. 3. 알자 4. 일하자
    
아름다운 기부

2019년 정초 부안군청은 깜짝 놀랄 제안을 받았다. 비록 야간이나마 60년 된 초중등 교육기관을 부안군청에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양쪽이 한두 번 접촉한 끝에 학교를 대표하여 임기태 전 부안군 의장이 권익현 군수에게 기부 관계문서를 건넸다. 부안읍 서외리 165와 277에 있는 대지 641평방미터의 대지 외 6건 4,039평방미터(1,021평), 블록조 211.75평방미터 교실 등 3동 337,5평방미터(102평)를 어려운 소년들의 문화 교육시설로 써 줄 것을 조건으로 기부 했다고 한다.
해방 전만 하더라도 겨우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웠을 뿐 부안읍 같은 데도 초등학교 하나뿐이었다. 한 달에 쌀 너댓되 되는 월사금(수업료) 낼 돈이  없어 학교에 보내지 못한 것만이 아니었다.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집안일을 보살펴야 했다. 어리면 어린대로 밥값을 해야 했다. 읍내 성당의 천주교 신부와 유지 몇 사람이 동문안 ‘뾰죽집’(천주교 성당) 근처에 야학을 세웠다고 한다. 향교 뒤 산비탈에 운동장을 닦고 천막을 치며 교실을 지었다. 초대 교장에 부안 교육계의 원로인 이우정 선생을 모셨다. 차츰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면에도 중학교가 생기자 야간 학교는 ‘청우 아동문학관’으로 바뀌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이룬 학교며 아무리 작은 대지와  건물이라 하더라도 성황산 자락 전망 좋은 곳에 있는 땅과 건물을 그렇게 선뜻 기부했을까.
“공부상으로는 윤갑철 곽래형 공동 소유로 돼 있었어요. 곽래형 씨는 학교 초기 윤갑철 선생과 함께 학교를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인 곽동식 선생의 아들이지요. 이 곽 선생님이 작년 6월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셨어요. 군청에 기부하겠다고 말입니다. 윤갑철 선생님도 선뜻 기부 절차를 저에게 맡기셨어요.”
임기태 의장의 말이다.
임의장의 열성은 활 쏘는 부안의 사정을 좁은 서림 공원 중턱에서 넓은 체육공원으로 옮겨 면목을 크게 바꾸는데 공헌한 ‘숨은 1등 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 누구 뜻을 맞추는지 마치 ‘맞춤 부부’ 같다고들 한다. 부인 정금주 씨와 함께.

도민 체전 5회 연승한 부안 ‘심고정’

 ‘심고정’의 궁사들은 지난 5월 전북도민 체전에서 ‘5회 연속 종합우승’을 했다. 이 통쾌한 승리를 선수의 승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안의 승리’라고 좋아한다. 이들을 키워낸 사정에는 사두를 비롯한 많은 임원이 있다. 그런데도 그 공을 임의장에게 돌리고 있다.
사정의 규칙은 엄격하다. 입사 순이며 누구도 뛰어서 올라갈 수 없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까마득해요. 나이만 먹었지. 하지만 낯 내놓지 않는 잔심부름은  제가 1등이에요. 지난 대회에 우승한 것도 우리가 단일팀인데다 단합이 잘 되는 사정으로 소문 났어요. 회원들이 궁사들 좋아하는 음식을 싸가지고 오고 어디다 기대지 않고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경비에 써요. 제가 가진  게 뭐 있어요? 돈이 있어요? 특별한 재주가 있어요?” 
1946 년생, 만 73세. 부인은 정금주 여사. 한 살 아래 1947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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