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는 기억하고 간직할 만한 건물이 여럿이다. 그 중에 하나가 사진에 나오는 건물이다. 두 사진은 같은 장소를 시기를 달리하여 찍었다. 왼쪽은 일제강점기 말의 부안 천주교회 때이고, 오른쪽은 1960년대 청우고등공민학교 시절이다. 사진의 건물은 부안읍 서외리 279번지로 성황산 중턱에 지금도 남아 있다. 하서면 등룡리에 있던 천주교당이 1935년 이기수 신부 때 부안읍으로 옮겨 올 때 택한 장소가 사진에 보이는 곳이다. 천주교는 이곳에서 현재의 장소로 성당을 새로 지어 옮기기까지(1960년대 초) 천주교인들의 신앙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장소이다. 지금도 내부에 들어가 보면 한옥으로 된 교회당의 형태가 남아 있고 좋은 나무를 써서 그런지 상당히 견고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황산 중턱으로 교회를 옮긴 천주교는 아이들 교육에 힘을 써 4년제 소학교를 세우고 문맹퇴치에 힘쓴다. 교우 자녀와 빈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공식 명칭은 ‘부안천주교회 학술강습소’라 했지만 사람들은 쉽게 신교당학교 또는 신교당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부안에서 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그 중에서도 월사금을 내기 어려운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 문턱에도 가기 힘들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소외된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에 힘썼다.

일제 말에는 1학년과 4학년, 2학년과 3학년이 합반으로 복식수업을 했는데, 한 학년은 여학생 10여 명을 포함하여 40여 명이었다. 가르친 교과는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 습자, 음악, 체조 등으로 일제의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44년 전쟁 말기에 강제 폐쇄되었다.(김형주 『김형주의 못다한 부안이야기』)

오른쪽 사진은 청우고등공민학교(靑友高等公民學校)로 이 학교는 중학교 과정이다. 1960년에 개교한 청우학교는 1963년도에 성황산의 천주교 옛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 1966년 자료를 보니, 교장 이우정선생과 교사(박기남, 윤갑철, 곽동식, 장동석, 박민평, 이태숙, 최규준, 강순금, 이승기)들이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청우학교는 입학금이나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쳤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쳤거나 가난해서 진학을 못했던 아이들이 다닐 수 있었다. 오후 4시부터 10시까지 이루어지는 야간학교였지만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느라 중간에 고만 두는 사례도 많았다. 1963년도에 27명의 1회 졸업생을 낸 후에 점차 많은 졸업생을 배출한다. 1965년의 졸업생들의 진학 상황을 보니, 부안농고(13명) 부안여고(3명) 덕수상고(1명) 중동고(1명) 군산동고(2명) 연초학교(11명) 등 총 31명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다른 지역 공민학교들이 정규 학교로 인정을 받으면서 지금도 존속 하는데, 청우학교는 학교의 명맥이 끊어진 상태다. 1980년대에 청우실고라는 이름으로 몇 년간 학생들을 모았지만 곧 문을 닫게 된다. 청우학교의 역사는 앞으로 더 발굴되고 정리 할 필요가 있다.

사진의 건물은 천주교 교회로, 청우학교로, 나중에는 부안문화원의 건물로도 쓰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지역이 중심지와 거리를 두면서 지역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벗어나 있다. 앞으로 부안읍 답사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옛 천주교회당을 꼭 답사지로 넣고 싶다. 이곳에서는 나라 잃은 신앙인들의 간구와 학생들이 힘차게 뛰어놀던 사라진 소리들을 새길 수 있다. 지금은 초라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한때 신앙의 공동체요, 교육과 부안 문화를 아우르는 의미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물이 지역 사람들의 관심으로 다시 살아나서 뭇 사람들의 찾는 발길이 잦아지고, 역사 속에서도 과거 역할들을 찾아내서 의미 있게 꽃 피울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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