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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 꽃97> 진서면 거무진 앞 바다에는 모정(茅亭)이

오래된 마을을 찾는 것은 답사의 큰 기쁨이다. 그 곳에는 농익은 이야기들과 오랜 우물, 나이백이 당산나무가 말없이 반긴다. 이런 요소들을 두루 갖춘 곳 중의 하나가 구진(舊鎭)마을이다. 말 그대로 옛날에는 수군(水軍) 진이 있었던 마을로 거무진, 검모포(黔毛浦), 또는 검모포진(黔毛浦鎭)으로 부른다.
곰소항에서 영전 방향으로 시가지를 막 벗어나면 왼쪽으로 드넓은 곰소염전이 전개된다. 그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진서면 구진마을이 나온다. 천마산을 머리로 하고 남향으로 자리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전에는 칠산 바다가 부려다주는 풍요를 노래하며 마을 주민들이 어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가 1938년 일제가 범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와 곰섬(일명 웅연도)을 연결하여 곰소 항을 축조하면서부터 이 마을의 어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초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어업의 문을 아예 닫아야 했다.
마을로 들어서면 오래된 우물이 있다. 우물 앞집이 김평수 어른 집인데, 밖에서 사람 소리만 들리면 이 분은 어느새 옆에 서 계신다. 이 어른은 동네가 바닷물에 잠긴 얘기며, 소금 굽던 자염 이야기, 우물 얘기, 당산나무, 새마을 사업 등 할 얘기가 태산이다. 일정이 있어 끝까지 들을 수 없음이 매번 미안했다.
검모포에 수군이 주둔해 있을 때, 훈련 모습인 저물녘의 호각소리는 꽤나 이색적인 풍경이었나 보다. 조선 선조 때 부안사람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은 우반동 일대의 경승 10곳을 골라 ‘우반10경(愚磻十景)’을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검모모각(黔毛暮角)’이다. 박순(朴淳, 1523~1589, 선조 때 영의정)은 허진동의 우반10경에 시를 붙였다. 아래는 ‘검모모각’에 붙인 박순의 시다.

지는 해 산 너머로 그림자 거두고/斜陽影斂遙岑外
화각(=피리)소리 옛날의 수자리에서 날려오네/畵角聲飄古戍間
그 소리 흩어져 들어오며 어둠 재촉하고/散入江天催瞑色
머물던 구름 다 돌아가 봉래산을 감싸네/宿雲歸盡鎖蓬山
-유풍연 역,‘ 동상집’


이 시는 당시 검모포 앞바다의 해질녘 풍경을 담았다. 바닷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둠을 가져오고 아름다운 구름이 되어 산을 감싼다. 그러나 매일 힘들게, 물속에서 목숨 걸고 훈련하는 수군들의 땀과 절박함은 아름다운 구름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고려 말에도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역할을 했던 곳이 구진 마을이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결정하고 고려를 거점으로 하여 여⋅몽연합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고려로 하여금 전함과 수송선, 식량, 모든 군사물자를 준비케 했다. 이에 난감해진 고려는 해상전의 어려움을 들어 설득했으나 원의 야욕을 꺾을 수가 없었다.
1274년 정월 보름에서 5월 그믐까지 변산은 들끓었다. 바로 이곳 변산의 검모포와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에서 전국의 3만 5백여 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크고 작은 전함 900척을 불과 넉 달 만에 건조하였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 당시 배를 진수 할 때 썼던 깔개목(바탕)이 검모포 갯벌에서 많이 나왔다.
사진은 2014년에 구진마을을 찾아 앞 바다의 풍광을 찍은 것이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원두막 같은 이 모정(茅亭)에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낮잠을 자고 정담도 나누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 풍광이 사뭇 달라졌다. 30번 국도가 4차선으로 이 앞을 지나느라 공사가 한 참이다. 이 바닷가 모정도 어느새 사라졌다.
앞으로 구진 마을을 찾아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우선 이 마을이 바닷가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느라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도로를 내면서 거무진 앞 갯벌은 저 멀리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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